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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났다?


 

1. 회원님에 대한 소개와 학창시절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안녕 하세요. 음.. 엊그제만해도 30대인줄 알았는데, 벌써 ‘불혹’이란 나이에 도달했네요. 뭐 딱히 해 놓은것도 없는것 같은데, 왜 이리 시간은 잘 가는지. 전 현재 캐나다 벤쿠버에서  Northwest Mettech Corp. 라는 플라즈마 코팅 시스템을 만드는 회사에서 코팅 Q/C를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형근 이라 합니다. 벌써 회사에 다닌지도 4년차가 됐네요. 현재 회사와의 인연은 박사후 연구까지 포함하면 6년이 넘었구요.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가다니 지금 생각해도 새삼 시간이 빠르다는것을 느낍니다.
전 한국에서 휘문고등학교와 명지대학교 무지재료공학과 학사와 석사를 먼저 마치고 늦게 군입대를 하였습니다. 고등학교때는 써클 활동 한다해서 공부는 정말 뒷전이었고, 뒤늦게 후회는 했지만, 해놓은것이 없어 ‘재수생’이란 이름으로 다시 1년을 지냈씁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입학했지요. 그리고 열심히(?) 대학교와 대학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가게 된것이지요. 뭐 이렇게 군대를 늦게 갈 생각은 없었는데, 계획이 잘 안맞아 떨어지더군요. 친구들은 진작에 제대해서 회사생활 할때 전 군대 이병 달고, 한참 어린 동생(?)들과 함께 그것도 우리나라 최전방 연천에서 생활 하였습니다. 좀 운이 없었다고 할까요???. 어쨋든 이렇게 군생활을 멋지게(?) 하고 대한민국 육군 병장으로 제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캐나다 벤쿠버로 유학을 오게 됐지요. 그때가 1999년 11월 21일 이였습니다. 날짜는 잊혀 지지도 않네요. 사실 미국으로 갈 생각이였으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안되어서 일단 벤쿠버로 온후 추후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이였지요..하지만, 다시 모든 상황들이 또 계획대로 안되어 그대로 벤쿠버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참 내 마음데로 되는게 없더군요^^.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토플 준비를 했습니다. 군대를 갔다온후 제 머리에 남은것은  A급 B급이라는 물건의 상태를 나타내는 영어알파벳뿐이었습니다. 말도 안되고, 늘 제 주머니에 있는것은 한국에서 가져온 영한 전자사전이였습니다. 누군가 얘기하면 늘 두드려 그 단어 뜻이라도 알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 다른것은 못들어도 짐작으로 알아듣고 안되는 영어 해가며 저의 캐나다 생활은 시작 되었습니다.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반신 반의 하는 마음으로 늘 하루 하루를 보냈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요? 현지 홈스테이를 하면서 알게된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도움으로 점점 캐나다 생활이 재미있어졌지요. 지금도 가끔 연락은 하고 지낼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 하였습니다.

당시 제겐 무언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며 그 무언가가 여기서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야 이 사회에서 또는 다시 한국을 가더라도 내 밥그릇을 챙겨 먹겠다는 생각이엿지요. 그래서 제일먼저 알아본것이 대학 박사과정 입학이였습니다. 캐나다는 미국과는 달리 종합 대학이 각 주마다 2-3개 정도 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제가 있는 벤쿠버에는 딱 두개가 있더군요. 그 두개중에서도 한개는 대학원 과정이 몇개 특정 학과에만 있는 것이구요. 그래서 제가 선택 할 수 있었던것은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UBC)라 불리는 학교 였습니다. 다행이 그 학교의 규모나 세계 대학 랭킹을 보니 30위권이더군요. 오~~~~
그래 여기 가보자 생각했지요..지금부터 입학시까지의 정말 웃지 못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다 지면으로 써 내야할지 모르겠네요.^^ 간략히 적어보면, 일단 세라믹학과를 찾아 담당교수의 관심분야를 찾았습니다. 저랑 맞는게 없더군요. 그래도 어떻합니까. 오직 이 교수님만이 제가 기댈수(?) 있는 사람인데요. 그때부터 전 계속해서 메일을 썼습니다. ‘받아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답변이 안오더군요. 또 썼습니다. 또 안옵니다. 정말 한 2틀에 한번씩 계속 했습니다. 약속 없이 찾아가 교수님 방문 앞에서 기다리기를 밥먹듯이 했습니다. 정말 1년만에 문이 열리더군요. 그렇게 해서 입학했는데, 헐~~. 한국대학원 성적은 인정이 안된다는 말에 다시 대학원 석사 과정을 1년 한후 성적이 좋아(?) 바로 박사과정으로 편입하게 되어 그때부터 안되는 영어 해가며 또하나의 가방 끈을 늘이게 되었습니다. 일단 입학은 했으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인의 근성’을 보여줬지요. ‘성실함’ 이게 무기였습니다.^^

이렇게 박사과정을 마친후 운이 좋아 당시 현재 근무하는 회사와 공동 프로젝트를 실행하게 되어 박사후 연구과정을 UBC에서 바로 시작 했습니다. 이때 제가 바로 현재 업무를 맡고 있는 플라즈마 코팅이란것을 직접 접하게 된 계기가 된것이지요. 이렇게 2년간의 박사후 연구과정을 마친후 현재의 회사에 입사를 하게되어 여러가지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으며, 현재는 세라믹/금속의 여러분야에서 코팅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영어는 죽는날 까지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입니다.


 

2. 회원님의 연구분야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세요. 그간 이루어 놓은 연구실적과 앞으로의 연구 방향 및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제 박사과정 전공은 졸겔법을 이용한 세라믹 코팅이였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코팅이란 큰 분야는 같지만, 방법이 전혀 다른 플라즈마 코팅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 갈것은 한국에서는 sol-gel을 졸-겔법이라 하지만, 영어발음은 솔-젤입니다. 처음에 이 발음 때문에 못알아 들은것 생각하면 참…… 어쨋든 이 플라즈마 코팅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쓰입니다. 제일 많이 쓰이는곳이라 할 것도 없이 많은데, 그래도 꼭 얘기를 해야 한다면, 아마도 가스터빈 엔진의 고온 산화방지용 열차폐 코팅에 많이 쓰입니다. 연료전지용 코팅 또한 현재는 플라즈마 코팅을 이용해 많이 연구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가스터빈 엔진에는 여러 부품이 있는데, 그 부품에 맞는 세라믹 재료와 코팅 방법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EB-PVD(Electron Beam-Physical Vapor Deposition)이라는 코팅 시스템이 있는데, 굉장히 비싼 장비와 그 운용비로 인해 현재는 플라즈마코팅으로 대처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듯 큰 국가의 기반산업뿐만 아니라 일반 산업 현장에서도 산화 부식과 연마제 코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사용이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아마도 이 시스템을 직접 만드는 곳은 없으며 모든것이 스위스나 미국 독일에서 그리고 간혹 일본산도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저희 회사는 자칭(?) 세계 최고의 슬러리나 용액 분사가 가능한 플라즈마 코팅 시스템을 개발하였고, 이 기술만이 위에 언급한 EB-PVD만이 가능했던 열차폐용 컬럼 코팅 구조를 재현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저는 주로 열차폐 코팅 관련 업무를 보는데, 그 것을 분석 하기 위해서 GE (General Electric) Aviation 에서 주관하고 발행하는 비행기 엔진 코팅 분석 자격증을 취득해 보유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저 말고 한국 사람으로 1명이 더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제가 한국인으로써 두번째 사람이 되는거랍니다. 정말 제 스스로 뿌듯함을 느낍니다. 현재 저희 연구 분야는 영역 제한없이 모든 코팅이 가능한 산업 분야에 맞추어 지고 있는데, 특히 요즈음은 EBC (Environmental Barrier Coating) 이라 해서 비행기 엔진뿐 아니라 모든 산업 분야에서 고온 다습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부품을 코팅으로 보호하는 연구를 타 기업뿐 아니라 대학교와 공동 연구 개발을 할 계획에 있습니다.

3. 이 직업 또는 연구분야를 정말 잘 선택 했구나 싶었던 때는 언제인지?
현재도 플라즈마 코팅 관련 직종은 희귀한 직업군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같은 분야에서 직장을 옮기는것도 쉬운것이 아니란 얘기지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회사에 정말 필요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것도 사실입니다. 늘 한국에 가고 싶은 동경이 있습니다. 언젠간 한국에서도 플라즈마 코팅 산업 특히 항공 산업 분야에서 저같은 사람이 필요치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면 희귀하면서도 전문직에 있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4. 인생에 영향을 준 사람이나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계기가 있다면?

아마 남들은 유명한 과학자니 아니면, 주변의 교수님들을 얘기 하겠지만, 전 언제 누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해도 답변은 늘 똑같을것 같습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어렸을때부터 늘 좀 늦었던 저를 생각하면, 항상 기다려 주시고 격려 해주신 저희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대기만사성’ 이런 얘기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제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 해봅니다. 며칠 전 처음 이 ‘코세니아가 사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때만 해도 아버지께서 병환이지만, 힘겹지만 저와 말씀도 하시며 그렇게 제 옆에 계셨었는데, 현재 지금 이 순간엔 보고 싶어도 볼수가 없는 먼곳에 가셨습니다. 하지만, 늘 제겐 언제나 기댈 수 있는 큰 버팀목입니다. 인생의 전환점이라 함은 아마 캐나다에 유학을 온 그때가 아닌가 싶네요. 저희 아버지께서 군대 제대하자마자 물어보시더군요. ‘내가 앞으로 네게 2천 만원을 주겠다, 그걸로 한국에서 살래 아니면 유학가서 공부할래’ 전 바로 ‘유학’이요 했지요. 그래서 지금 이자리에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5. KOSEN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현재 KOSEN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요?

코센은 제가 여기 캐나다 UBC에서 박사과정 중 한인회에서 말하길 코센에 모두 가입하면 우리 활동금 보조 받을 수 있다 하더군요..그래서 서로 많이들 가입했고요. 사실 전 그때 코센이 뭔지도 모른체 가입을 했구 로그인도 가입을 한 이후로 한적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제가 현재 회사에서 이메일을 확인하는데, 언젠가 부터 계속해서 ‘분석물’이란 제목으로 이메일이 오는것입니다. 무심결에 봤더니 플라즈마를 이용해 연료전지를 코팅한것이 있더군요. 그리고 그것을 다른 회원분이 분석한것도 있고해서 한번 봤는데, 음.. 좀 오타가 있었고, 오류도 있고 해서 게시판에 제가 아는데로 오류를 말씀드리고 정정을 요구(?) 했더니 바로 연락이 오더군요. 놀랐습니다. 아 이 사이트가 잘 관리가 되고 있구나 그후 관심있게 지켜보다 저역시 분석 요청자료 분석 신청을 하고 분석을을 올리고 하며 지내다 좀더 깊이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현재는 전문가로 위촉받아 세라믹/코팅관련 전문가로 활동 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섹션이 ‘what is’입니다. 제 분야는 아니지만, 여러 질문도 보며 저역시 배우고 있고, 제가 아는모든것을 지면으로 나타내기는 힘들지만, 최대한 답변을 하고 다시 그로 도움을 받았다는 덧글을 받을때 보람을 느끼게 되서 좋아합니다.

 

 

6. KOSEN 회원과의 교류와 관련해서 개인적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국내 과학기술자로서 KOSEN회원과 전 세계의 한민족 과학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이와 관련하여 KOSEN에 바라는 점 혹은 KOSEN에 거는 기대나 발전 방향을 제시해주세요.
아직은 활동기간이 짧아 잘 모르겠으나 여기 현지 벤쿠버 에도 활동모임이 있는것으로 보이는데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가 없네요..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지 그렇게 되면 저역시 여기 현지에 계신 다른 회원분과 더 돈독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것 같습니다. 세계의 모든 회원분들이 하나로 뭉쳐 이렇게 서로 지식과 ?을 공유하는게 정말 보기 좋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한국에서는 코센 페스티벌이라해서 정기 모임이있느데, 외국에 거주하기에 참여하기가 좀 힘듭니다. 저역시 오프라인으로 모여 직접 얘기하는것을 좋아하는데, 저처럼 외국에 거주하는 코센 회원분들이 한국분들과 함께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7. 마지막으로 이공계 종사자 혹은 과학도에게, 또는 이 길로 접어들고자 하는 후학에게 힘이 담긴 격려를 해 주신다면.

언젠가 부터 이공계 기피현상이 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됐는데, 이공계는 국가 산업을 지탱할 수 있는 기반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도 하구요. 늘 내자리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면 그 성과는 반드시 보답을 받게 될것입니다. 모든 이공계 학도분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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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분야에 계시네요... 늦게 보게되었지만, 훌륭한 연구 많이 하셔서, 나중에 한국에 꼭 도움주는 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