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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가장 가벼운 입자의 질량을 찾아낸 사나이

스토니브룩 소재 뉴욕주립대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물리학의 명문이다.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 이휘소 박사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C.N. 양 박사가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내려 롱아일랜드를 따라 동쪽으로 2시간 가량을 달려서야 스토니브룩 캠퍼스에 도착했다. 뒷머리를 네 갈래로 땋아 구슬을 꿴 헤어스타일에 우람한 체격의 사나이가 손을 내밀었다. 중성미자의 질량을 발견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정창기 교수다. 중성미자의 질량을 발견한 것은 일미 공동 연구팀이 했던 슈퍼 카미오칸데와 K2K실험이다. 그는 슈퍼 카미오칸데 실험에 초창기부터 참여를 했고, K2K실험에서는 미국쪽의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한국을 떠난 지 20년. 한국어가 서투른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태어나서 지금까지를 무엇을 했고, 왜 물리학자의 길을 택했는지 말해달라. =1955년 대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까지 거기서 살았다. 큰 누님이 나보다 거의 20살이나 많았고, 바로 위의 형이 7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가 망하셔서 빈털터리가 돼 아이들 교육이라도 잘 시키겠다며 식구를 전부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당시에는 촌이었던 서울 대림동 간이주택에서 살았다. 미국 말로 하면 게토 비슷한 동네였다. 구로국민학교를 한시간 반씩 걸어서 다녔다. 구로국민학교에서는 10여년 동안 용산고등학교보다 좋은 학교에 들어간 학생이 없었는데 공부를 매우 잘해 서울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바깥에서 놀고 있으면 아줌마들이 와서 내 얼굴을 구경하기까지 했다. 서울중학교에 가서도 집안이 경제적으로 안 좋아 거의 1년에 한번씩 이사를 다녔다. 아버지는 일정한 직업이 없이 복덕방도 하고, 발명도 하고, 여러 가지 손을 대셨지만 운이 나빠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6살부터 교수가 되겠다고 할 정도로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아버지가 발명에 매달리고 선비 타입이어서 여기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고려 때 정몽주가 선조이다. 그런지 선비 전통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기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중학교 때 아인슈타인 책을 읽고 생명의 기원,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물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우주는 끝이 없다는데 내 생각에는 분명히 끝이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어떤 경계가 있어야 하고 그 경계 바깥에는 또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데.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이어졌다. 이런 철학적 문제까지도 생각하다가 이런 의문에 대해 해답을 얻으려면 물리를 공부해야 한다고 중학교 1-2학년 때쯤 결심했다. 만화책도 우주나 물리에 대한 것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서울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울대에 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말을 잘 하지 않는 아버지의 스타일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첫 시험을 보았는데 늘 전교에서 1등을 하다가 반에서 34등이 나와 깜짝 놀랐다.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더니 야 너 보아라, 얼마나 세상이 큰지 알겠지. 얼마나 똑똑한 아이들이 많으냐. 앞으로는 내가 성적에 대해 관여하지 않을 테니 네가 알아서 해라. 고 했다. 그때부터 성적표를 부모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공부를 잘 했나? =그 당시에도 서울대 물리학과는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1년에 5등씩만 올라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게 성적이 올라갔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면서 입시 준비를 했다. 그래서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해 교양학부에서는 공부를 꽤 열심히 했다. 물리와 철학 체육은 A+를 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시간에는 축구를 주로 했다. 과학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 겠다고 생각해 2학년 초에 산악회에 들어갔다. 학교에 가면 산악반에 가서 살았고 주말마다 선인봉 인수봉에 바위를 타러 다녔다. 계절마다 원정을 다녀 2학년 때는 거의 공부를 안했다. 하지만 산악회를 하면서 우정이 생겼다. 지금도 한국에 돌아가면 만나는 친구들이 산악회 친구들이다. 3학년 때 문리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겨 산악회 간사장을 맡았다. 그런 뒤 성적이 더 나빠져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받았다. 3학년 말 때는 양자역학을 듣는데 데모를 하느라 학교가 문을 닫아 1월 달에야 기말고사를 보았다. 그런데 시험을 안보고 동계원정을 가서 F학점을 받기도 했다. 4학년 때부터는 정신을 차려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군대를 1년 반 갔다 오고 79년에 서울대를 졸업했다. 학교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토플과 GRE성적이 좋아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우주의 진리를 알고 싶고 철학과 음악을 좋아한다고 편지를 쓴 기억이 난다. 인디애나대학 대학원에서 입자물리실험으로 방향을 정했다. 학위는 인디애나대학에서 했지만, 83년 SLAC란 이름의 선형가속기가 있는 스탠포드대로 옮겨 실험을 하면서 3년만에 박사학위를 끝냈다. 그 뒤 SLAC의 박사후 연구원으로 4년을 있다가 1990년 뉴욕주립대에 조교수로 와서 96년에 부교수가 됐고, 2000년에는 정교수가 됐다. 박사학위 논문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나? =박사 과정 학생일 당시 내가 속한 SLAC에서는 양전자와 전자를 충돌시켜 여러 개의 입자가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만들어는 입자들은 수조분의 1초의 매우 짧은 라이프 타임을 갖고 있는데 이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입자의 성질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작업이었다. 전하만 반대이고 모든 성질이 같은 양전자와 전자를 거의 빛의 속도로 부딪치면 물질이 완전히 에너지가 된다. 이 에너지가 다시 물질로 변해 양성자와 중성자 등 여러가지 종류의 입자들이 만들어진다. 이는 마치 하얀 당구공과 검은 당구공이 부딪혀 텔레비전이나 자동차가 나오는 것과 같다. 매우 신비로운 현상이다. 내가 속한 실험그룹은 아주 세밀하게 입자의 궤적을 잴 수 있는 새로운 검출기인 스트로 체임버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1986년에 실험을 했다. 이 결과 표준모형의 자세한 내용을 지지하는 결과를 얻게 됐다. 이 장치는 입자가 체임버 내부를 지나가면서 개스를 이온화하면 이를 재게 된다. 당시의 체임버의 구조는 개스와 함께 와이어가 많이 들어있었다. 개스가 분해돼 전자와 이온을 만들면 이것이 와이어에 도착해 전기신호를 발생시켜 측정을 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만든 것은 와이어를 아주 작은 스트로(빨대) 속에 넣은 것이었다. 이렇게 만든 결과 입자가 지나가면서 어느 와이어 근처를 지나가는지 정확히 알 수 있게 됐다. 가장 중요한 연구 업적은? =98년 일본에서 했던 슈퍼카미오칸데 실험을 통해 역시 중성미자(중성미자)의 질량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일이다. 또한 2001년 역시 일본에서 했던 K2K실험을 통해 중성미자의 질량이 존재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일이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과 미국 연구팀이 공동으로 했던 두개의 실험에 나는 초창기부터 참여를 했고, 특히 K2K실험에서는 미국 연구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대변인으로 일했다. K2K라는 실험 이름도 내가 지었다. 대변인(스포크스퍼슨)이라는게 무엇인가? =입자물리학 실험에는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슈파카미오칸데 실험의 경우 참여자가 120명이고 논문저자도 무려 120명이나 된다. 그 중에서 학생이 40명, 교수가 40명, 포스트닥이 40명 가량 된다. 사실 이런 실험은 누가 했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합심을 해서 좋은 장치를 만들었기 때문에 발견을 한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이 머리가 좋아서 발견한 것이 아니다. 저자도 알파벳 순서로 쓴다. 하지만 실험의 크레딧은 대변인이 받는다. 대변인은 언론을 상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험을 총괄하는 책임자이다. 전체 그룹을 대변해서 말을 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말이다. 나는 K2K실험의 미국쪽 대변인이었다. 일본의 대변인은 도쿄대 도츠바 교수였다. 나는 초창기인 1992년부터 슈퍼카미오칸데 실험장치의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참여를 했다. 또 나는 미국그룹의 시니어 멤버로 슈퍼카미오칸데와 K2K실험의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슈퍼카미오칸데 실험은 일본이 돈을 많이 투자해서 했지만, 실험 결과에 대한 분석은 일본, 미국이 서로 팀을 만들어서 따로 했다. 내가 주축이 된 스토니브룩팀은 일본의 데이터를 옮겨서 처리해 미국대학에 나눠주는 역할을 했다. 하루에 20기가나 되는 엄청난 데이터가 오기 때문에 이것을 나눠주고 관리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결국 미국과 일본 연구팀의 분석 결과가 똑같이 나와 중성미자의 질량이 존재한다는 결과가 발표됐다. 슈퍼가미오칸데 실험은 일본이 1억달러의 비용을 들였다. 미국에서는 600만 달러만 기여하고 지적인 노동만 제공했다. 중성미자가 질량을 갖는다는 게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가? =중성미자(중성미자 neutrino)의 질량이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그 동안 학계에서는 논쟁이 끊임없이 진행돼 왔다. 지금까지 입자물리학을 이끌어 온 표준모형은 중성미자가 마치 광자처럼 질량이 없다고 가정했으나 이번 결과는 표준모형이 틀렸고, 아직 이론 수준에 머물고 있는 대통일 이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준 셈이다. 1960년대 이후 확립된 표준모형은 1940년대와 1950년대 발견된 수많은 소립자의 상호작용을 밝힌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12개의 기본입자 즉 6 개의 쿼크와 6개의 경입자로 이루어져 있다. 경입자인 중성미자는 전자중성미자, 타우중성미자, 뮤온중성미자 등 3종이나 되지만 질량 유무가 확인되지 않아 물리학계의 최대 관심사였다. 중성미자는 태양에서 1제곱 센티미터당 매초 100억개가 날아올 정도로 엄청나게 많지만 전하를 갖고 있지 않고 물질과 거의 상호작용을 하지 않아 대부분의 입자가 지구를 뚫고 그대로 지나가 버린다. 중성미자가 질량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나? =중성미자의 진동현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는 일본 카미오카 광산 갱내에 설치된 양성자 붕괴탐색 및 중성미자 관측장치(슈퍼카미오칸데)를 이용해 대기중의 중성미자의 진동 변환이 처음 확인했다. 우주에서 날아오는 양성자나 헬륨 입자는 대기와 부딪쳐 중성미자를 만들어 낸다. 슈퍼카미오칸데 검출기를 통해 이 중성미자를 관측해 보니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숫자가 훨씬 적었다. 이는 중성미자가 진동하면서 다른 입자로 변환됐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적으로 중성미자가 질량이 없다면 이런 중성미자 진동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돼 있다. 이런 진동현상은 중성미자가 무게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K2K 실험도 상당히 재미있었는데 어떻게 했는가? =그렇다. 슈퍼 카미오칸데 실험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중성미자를 관측해 질량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라면, K2K는 중성미자를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슈퍼 카미오칸데에서 한 실험이 맞는지 증명해보자는 목적이었다. 다시 말해 슈퍼 가미오칸데는 발견을 위한 것이고 K2K는 증명을 하기 위한 것이다. K2K 실험을 위해 우리는 일본 쓰쿠바에 있는 고에너지가속기연구소(KEK)의 가속기로 인공 중성미자 빔을 만든 뒤 이것을 250km 떨어진 카미오카의 슈퍼카미오칸데 지하검출 장치로 발사해 뮤온중성미자의 일부가 다른 중성미자로 진동하는 현상을 확인했다. 중성미자가 진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두개의 실험을 통해 지금은 중성미자가 질량을 가진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언제부터 가속기 실험에 관심을 갖게 됐나? =처음 스토니브룩에 부임했을 때에는 초전도입자가속기(SSC)를 계획하는 일에 관여했다. 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미국 정부가 가속기 건설을 중단해 내 연구도 중단됐다. 그래서 세계의 입자물리실험을 돌아보니 슈퍼가미오칸데가 가장 중요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1991년 계획 단계에서부터 일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기 시작해 1992년부터 정식으로 함께 일을 했다. 물론 그 사이에 미국 시카고의 페르미가속기연구소에서 하는 실험에도 참여해 1994년 탑 쿼크를 찾는데 그룹 멤버로서 함께 일했다. 이런 발견은 450명 씩 집단을 이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했다고 하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고 여러 사람이 함께 했다. 탑 쿼크는 마지막으로 발견된 쿼크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표준모형에서 이미 탑쿼크가 있고 무게도 어느 정도가 되는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 탑쿼크의 발견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우노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이 실험은 슈퍼 카미오칸데보다 13배 더 큰 검출기를 지하에 만들어서 양성자의 붕괴를 관찰하려는 것이다. 실험장은 뉴멕시코의 핵폐기물 처분장 터에 함께 만들려고 한다. 처분장을 준비하면서 지질학적 조사를 완벽하게 했고, 그곳의 광물 지질이 암염이어서 파내기가 쉽기 때문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요즘 이를 준비하는 학회를 스토니브룩에서 계속 열고 있다. 현재의 표준모형에 따른다면 양성자는 한번 만들어지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의 표준모형보다 더 진전된 대통일이론에 따르면 양낼沮?안드로메다에서 초신성이 터져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본 중성미자는 수십개에 불과하다. 실험 물리학은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인데 요즘 직접 실험도 하나? =실험물리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고체물리 실험과 입자 물리실험은 전혀 다르다. 고체 물리 실험은 3-4명이 실험기구를 만들어서 할 수 있다. 하지만 입자물리는 실험이 워낙 커서 혼자서 할 수가 없다. 입자물리실험을 하려면 기계, 전자도 알아야 하고 나온 데이터가 워낙 방대해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아주 좋아야 한다. 물론 물리는 필수이다. 또 100명씩 함께 연구를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관리를 하고 정부에?돈을 받아와야 하고 한다. 그래서 실험하는 사람은 두가지 타입이 있다. 한가지는 전문적으로 한가지 일을 파고 드는 사람이 있고, 또 한가지는 여러낼沮?안드로메다에서 초신성이 터져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본 중성미자는 수십개에 불과하다. 실험 물리학은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인데 요즘 직접 실험도 하나? =실험물리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고체물리 실험과 입자 물리실험은 전혀 다르다. 고체 물리 실험은 3-4명이 실험기구를 만들어서 할 수 있다. 하지만 입자물리는 실험이 워낙 커서 혼자서 할 수가 없다. 입자물리실험을 하려면 기계, 전자도 알아야 하고 나온 데이터가 워낙 방대해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아주 좋아야 한다. 물론 물리는 필수이다. 또 100명씩 함께 연구를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관리를 하고 정부에서 돈을 받아와야 하고 한다. 그래서 실험하는 사람은 두가지 타입이 있다. 한가지는 전문적으로 한가지 일을 파고 드는 사람이 있고, 또 한가지는 여러낼沮?안드로메다에서 초신성이 터져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본 중성미자는 수십개에 불과하다. 국적은? =아직 한국인이다. 한국인으로서 관리자의 위치에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실험 분야는 문화적으로 미국 사람들과 섞여야 하기 때문에 극복해야 할 것이 많고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새무얼 팅이라고 MIT의 노벨상 받은 중국학자도 실험물리학자다. 그 때만해도 실험이 10명 정도가 있으면 했지만, 요즘에는 수백명씩 하니까 훨씬 더 힘들다. 실험쪽에서 요즘은 동양사람으로서 성공하기가 예전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미국은 다른 인종에 대해 다른 나라에 비해 더 개방적이고 인종 차별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사회적 분위기이기 때문에 좋은 나라이다. 나도 인종 차별을 받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성공에 방해가 될 정도의 차별은 없다. 여러 가지 실험을 바꿔가면서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 이유라도 있나? =나는 학생 때부터 한가지 일을 너무 오래 하면 흥미를 잃어버리는 성격을 갖고 있다. 다방면을 하는 것을 좋아해 운동도 축구, 배구, 미식축구 요즘에는 운동은 잘 안하지만 농구도 보러가고 배구, 야구 다 좋아한다. 실험도 원형 가속기, 선형 가속기, 지하 검출기 등 여러가지를 했다. 처음에는 전자-양전자 충돌인 스토리지 링(원형가속기)을 갖고 실험을 하고, 포스트닥할 때에는 선형가속기(SLAC)를 갖고 연구했다. 그 다음 조교수 시절에는 페르미연구소에서 테바트론이란 양성자-반양성자 충돌실험을 했다. 네번째는 지하의 수조에서 입자를 검출하는 슈퍼 가미오칸데 실험을 했다. K2K는 반은 지하고 반은 가속기이다. 운이 좋아서 여러가지 좋은 실험에 많이 참여할 수 있었다. 앞으로 20년 동안 뭔가 큰 실험을 하고 싶다. 과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할 실험을 잘 선택하는 것이다. 어렸을 적 우주에 대해 가졌던 의문이 풀렸나 =물론 안 풀렸다. 인간이 우주의 많은 것을 알아냈는데 아직도 우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투성이다. 우주의 큰 것 스케일에 비해 얼마나 우리가 작은 존재인지 매일 실감하면서 산다. 그런데 뭣하러 연구를 하나? =인간의 본능 가운데 호기심라는 게 있다. 사람에 따라 정도가 다르지만 나 같은 사람은 이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고, 지금 당장으로서는 한계가 명백하지만 조금씩 알아내서 다음 세대에 전해주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만큼은 알게 될 것이다. 20세기의 물리를 보면 전기, 트랜지스터, 원자폭탄, 월드와이드웹 등이 모두 물리에서 나왔다.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과학을 하지만 사회적으로 영향을 많이 미친다. 사실 물리학자들이 연구를 할 때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연구를 하지는 않는다. 가장 큰 물리학자의 사회적 기여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호기심을 다른 사람 대신에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리학자들이 세금을 많이 쓰지만, 연구 결과를 납세자에게 알려줘 그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우주의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우주 전체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른다. 전체를 안다는 자체가 철학적으로 매우 힘든 질문이다. 아주 큰 우주를 하려면 상대성 이론을 적용해야 하는데 그러면 시간의 정의가 아주 힘들어진다. 그래서 블랙홀이나 빅뱅 직전의 상태에서는 시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조차 잘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3차원에서 사는데 초대칭이론에서 보면 10차원 이상이 등장한다. 이런 세계는 생각해보고 계산해낼 수는 있지만, 실험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추구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주를 알면 알수록 더 신비하기 때문에 더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점점 더 먼 별을 관측할수록 우주의 초기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물리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건강 때문에 고萱?했는데 =98년까지 꼭 10년 동안 병으로 고생했다. 머리가 많이 빠져서 머리를 길렀는데 그러다 보니 꽁지머리 스타일이 됐다. 자가면역질환으로 관절은 물론 내장까지 내 자신의 항체가 공격하는 고통스런 병이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치료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낫게 됐다. 배구를 하다가 무릎의 힘줄이 끊어졌다. 병원에 들어가 입원해 항생제를 많이 먹었는데 항생제가 이것을 고쳐준 것 같다. 퇴원하니까 완전히 없어졌다. 스토니 브룩에 대해 말해 달라. =1950년대 말에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젊은 사람들이 군대에서 돌아오면서 대학들이 많이 생겼다. 뉴욕주 안에는 콜롬비아 등 사립대만 있었는데, 당시 주지사인 록펠러가 캘리포니아주립대처럼 좋은 주립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현재 스토니브룩, 알바니, 버펄로 등 뉴욕주립대가 40개 캠퍼스가 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주립대학 시스템이다. 자연과학 분야와 의학에서는 스토니브룩이 가장 중요한 캠퍼스이다. 첫번째 대학 총장이 물리학자여서 물리과를 키웠다.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인 C. N. 양을 아인슈타인 체어를 주고 모셔오는 등 유명한 물리학자를 데려왔다. 시엔 양이 이론물리센터를 만들고 현재는 미국 내에서 물리학과가 랭킹 10위 정도 된다. 내가 스토니브룩에 올 때도 C. N. 양의 명성을 듣고 왔다.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나 =이름은 비비안이다. 이탈리아계 여성이다. 나는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 SLAC에 있을 때 사교 댄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웠다. 비비안은 당시 교사였다. 마음이 맞아서 1990년 포스닥 끝날 때쯤 결혼하게 했다. 이 사람은 보자 마자 평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3명이다. 8살, 7살, 3살. 딸 딸 아들이다. 장시간 인터뷰에 감사드린다. =내가 오히려 영광이다.(정 교수는 인터뷰 중에도 여러 차례 전화를 한 부인 비비안을 만나러 바쁜 걸음으로 캠퍼스를 떠났다.) Chang Kee Jung Professor of Physics Department of Physics and Astronomy 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SUNY) at Stony Brook Stony Brook, NY 11794-3800 Telephone: 631-632-8108 (office) 631-632-8101 (Fax) e-mail: alpinist@nngroup.physics.sunysb.edu chang.jung@sunysb.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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