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가르치는 대륙의 별-박종원 교수
2002-07-30
조강수 기자
- 1996
- 0
"장대한 대륙의 하늘에 드문드문 떠 있는 별 같은 존재라서 아닐까요. 대륙의 별은 화려하기보다 외롭다는 건 아시나요"
중국 연변과학기술대 화학공정과 박종원(38`조교수)씨는 이달의 코센 인물로 선정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중국에 사는 코센인의 희소가치를 인정해 별의 얼굴 깨끗이 씻어줘 한번 반짝이게 해 주려는 배려가 아니겠냐고 그 나름의 해석을 내놓았다.
"사람들의 빈곳을 꼭 필요로 하는 것으로 채워주면 즐겁다"는 그다. 사랑의 의미를 한 컷 짜리 만평에 담아낸 '러브 이즈...'시리즈 중에는 '사랑이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라는 유명한 정의가 있다. 그 구절을 연상케 하는 순수한 마음. 그런 마음가짐 하나만으로도 그는 자격이 충분해 보였다. 스스로를 '외로운 별'이라고 칭한 건 한국인이면서 중국에 터 잡고 사는 이방인의 존재론적 지위를 염두에 둔 때문이리라.
대륙의 외로운 별은 지도상으로 보면 대륙의 변방 마을의 작은 점 하나에 둥지를 틀고 산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북산가 연길 시내. 백두산 근처, 북한 두만강까지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보금자리가 있다. 겨울에는 영하 15도 까지 내려가 인적이 드물지만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4월부터 10월까지 서울 직항로가 뚫려 하늘길이 열리는 건 순전히 백두산 관광 상품 때문이란다.
지금 사는 곳은 그가 태어난 강원도 두메 산골을 연상케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이사 온 후 줄곧 서울에서만 살아왔지만 꿈엔들 잊힐 리 없는 게 고향이다. 어렸을 때 취미는 고장난 물건을 고치고 새로 산 물건은 해체했다가 재조립하는 것이었다. 가전제품이 주로 희생양이 됐단다. 원상복구가 안 된 가전제품이 더 많은 탓에 언제나 가족들의 핀잔은 그의 차지였던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조금 병적이었어요. 한번 시작했다 하면 밥도 거르고 밤을 꼬박 새워야 직성이 풀렸거든요. 제겐 그게 머리를 식히고 맑게 하는 비법이었는데..."
끔찍이 아끼는 국보급 아내 오정순씨와 두 딸 희수(7), 은정(6)을 데리고 중국행 비행기를 타는 모험을 감행한 건 1998년이었다. 중국에 제2의 고향을 두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만 살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
"유학은 아니죠.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고 교수가 되려고 왔거든요. 사립학교인 이 곳 연변 대학엔 10개국 사람들이 교편을 잡고 있어요. 저도 처음부터 이 학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중국은 그에겐 여러 모습으로 다가온다. 처음 와서는 고생도 많이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아팠을 때 병원 가는 것이다. 중국에서 병원은 병을 고치는 데라기 보다는 약을 더 많이 팔려는 얄팍한 상술이 판을 치는 곳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다. 그래서 아프면 빨리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병원에 데리고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도 이런 사정을 알고 부터는 아파도 병원에 가자고 조르질 않는다.
아내에게 가장 미안한 것은 아이 둘을 낳으면서 한번도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이다. 희수는 내내 병실을 잘 지키다가 아내가 '지금은 괜찮을 것'이라고 해 후배결혼식에 간 사이에, 은정이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사이에 기습(?) 출산을 해서다. 특히 은정이의 경우 아내는 혼자 병원을 찾아가 1분만에 출산을 끝마치는 요술을 선보였다. 병원비도 절약되고 건강 회복도 빨라 아내가 이쁘기 그지없었음은 물론이지만 미안한 마음은 가슴에 앙금처럼 남아 있다. 희수는 첫 아이인데다 박교수가 제일 소질이 없는 그림과 음악에 재능을 보여 아빠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새침데기 은정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기만 하다.
또 중국은 나라 자체가 자본주의식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그는 "중국의 안을 들여다보면 이미 자본주의의 물이 광범위하게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실사구시의 실용주의적 성향이 강하지만 빈부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심은 각박해져 가고 있다. 부와 가난은 대물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별한 경우 예외는 있다.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과 특별한 관계일 경우엔 변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이나 소질보다 인간 관계가 더 중시되는 이른 바 '관시(關係)문화'의 소산이다. "이 나라에선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어요. 돈과 관시를 동원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거죠." 그러나 당의 명령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규정도 엄격히 지켜진다. 개혁개방을 추구하긴 해도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의 색채가 짙은 중국에서 사는 게 쉽지 않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중국은 발전 가능성이 무한대로 열려있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박교수는 "중국인에게서 배울 점은 인내심과 실용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주저 없이 꼽는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중국인들은 거의 다투지 않아요. 서로 웃으면서 협상을 하고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아 가는 거죠." 순리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심을 발휘해 상대방이 부담을 갖지 않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게 배려하기 때문에 싸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과학 입국으로서의 미래도 밝다. 중국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군사 기술 분야에선 자체 기술을 갖고 있다. 위성과 군사, 안보 면에서는 오래 전부터 국가 주도로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왔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수준이 러시아의 80% 정도에 이른다. 우리보다 핵기술, 광학기술 분야에서는 앞서 있고 기초지식 분야에선 선진국을 제쳤다. 반도체와 자동차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상대적으로 뒤쳐져 있는 응용분야에서도 줄기차게 추격해 오고 있다. '베이징의 상인'들은 상술이 뛰어나다. 국가적 차원에서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를 뿌리내리기 위한 교육과 훈련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박교수는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위한 중국의 거국적인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중국은 무서운 나라"라고 말했다.
혹시 월드컵 기간 중에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이 더 강도가 높아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월드컵에서 중국 국가 대표팀이 기를 펴지 못했죠. 한 골도 못 넣고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땅덩이도 작은 한국이 파죽지세로 4강까지 올라갔으니 배가 아플 만도 하죠. 당국의 통제 하에 있는 중국 언론들이 분풀이를 한 거예요. 편파 왜곡 보도를 해 국민 감정을 달랬다고 보면 됩니다. 중국인들 대부분은 진실을 알고 있고 중국 당국도 수위를 조절하고 있지요. 초기에 사소한 갈등은 있었지만 심각한 수준이 아니랍니다."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박교수의 설명에 적이 안심이 됐다.
박교수: "전공이요? 아무거나 '막분리'하는 거죠"
조기자: "막(마구)분리한다구요? 뭘 막분리하는데요?"
박교수: "막(膜)분리한다니까요..."
덤 앤 더머의 대화같이 들리는 이게 박종원 교수식 유머다. 386세대답다. 피식 웃음부터 나온다. 선문답 같기도 하고, 말의 유희 같기도 해서다. 나는 그에게 단지 전공이 무어냐고 물었다. '분리공정중 막분리공학(membrane separation)과 그 응용'이 정답이다. 그러나 그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 한 단어를 냅다 던진다. 그게 곱씹어보니 맛과 향이 난다. 대륙의 호방한 풍모가 밴 것일까. 여유가 느껴졌다. 이제 반은 중국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막분리란 막피(membrane)를 분리매개체로 분리하거나 농축하는 것이다. 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막분리 공학은 한국에는 20년 뒤인 80년대에 도입이 됐다. 환경과 수처리 분야에서 대규모로 응용됐다. 바닷물을 농축해 음용수와 소금을 만들어 낸다. 사람 몸 속의 피를 투석막을 이용해 맑게 하는 데 응용되기도 한다. 가정용 정수기의 부속품 중에도 막분리 기술이 들어가 있다.
그는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연변과기대의 교수로서 화학공학을 가르치는 교육자다. 그에게 학과 공부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삶과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아직 풋풋하고 때묻지 않은 중국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애정을 가꾸는 훈련을 시키는 게 무엇보다 보람차다는 것이다.
"중국 젊은이들의 애정 표현은 미국 유럽 등 서구 스타일이예요. 한국보다 더 개방적이죠. 여기가 유교의 발상지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랍니다." 그는 뜻밖에 이런 말을 했다. 게다가 남자보다 여자가 애정 표현에 더 적극적이란다. 금세기 들어 남녀평등을 강조하는 사회 풍토가 자리를 잡으면서 애정 표현에 적극적이 된 것 같다는 자상한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유행 따라 살며 제 멋 찾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게 중국 청년 문화의 한 코드로 자리잡았다.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한류 열풍은 중국 대륙을 뜨겁게 달구었다. 부유층 자녀들은 한국 매니아들이 제법 많다. 한국의 드라마나 음악, 영화에 열광하는 한류파들이 자생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한국인들은 유럽인이나 미국인에 비해 소외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요." 면전에서는 대우하는 것 같지만 내심은 다르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이 흉내내거나 쫓아올 수 없는 무언가를 한국이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게 박교수의 지론이다.
그는 한국에서 최근 대통령 아들 둘을 비리 혐의로 구속한 것을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했다. 중국에서는 알아도 할 수 없는 일을 한국인들이 해 냈다는 부러움 섞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과학의 미래는 기술력에 달려 있습니다. 기술력 없이는 세계 무대에 명함을 내밀기가 어려워요. 세계의 유명브랜드와 맞먹을 정도로 인정을 받으려면 우리만이 갖고 있는 기술을 다른 나라에 팔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하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유아 적부터 창의성과 독창성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특히 자원이 부족한 한국은 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신토불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과 인재 양성에 적극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소기업 활용 방안을 내놨다.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좋은 기술을 개발하려 해도 자금이 없어 외인구단처럼 투쟁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투자 및 개발 환경만 업그레이드 시켜 주고 믿어주면 크게 성공할 겁니다"
지난해 1월 전공 관련 자료를 찾다 코센과 첫 인연을 맺게 됐다는 박교수. 초창기 멤버는 아니지만 가입 순서로 보면 어림잡아 서른 번째는 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그가 분석한 자료는 7건. 중국과 관련된 대화 창구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6월에는 해외 과학자 20명 내외로 구성되는 코센 전문가로 위촉돼 내년 6월까지 중국에서 발표되는 최신 과학기술 자료를 발빠르게 전달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코센은 제겐 인터넷상의 집 같은 존재입니다. 대륙에서 떠돌던 별이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라는 거죠. 도움을 받았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되돌려 주려 하다 보니, 시공을 초월해 소중한 분들과 교류할 수도 있었어요. 제겐 행운이었죠."
그는 애정 고백과 함께 "더 많은 과학자들이 더 자주 이곳을 찾도록 기발한 홍보방법을 찾는 게 필요하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