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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그 여자의 트렁크 속사정




그들은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여자는 불안하게 움직이던 전철 안 형광등을 보면서 묘하게 흔들리던 마음을 잡고 있던 찰나에, 그 남자는 다가오던 직장동료로부터 “괜찮냐” 라는 질문을 듣게 된 순간부터였다. 그 남자와 그 여자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메고 있던 핸드백과 가방을 손에서 떨어트린 채 현관 신발장에서 한 두 컬레의 신발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전화통화를 하며, 여행갈 채비를 서두른다. 그리고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이런 제안을 하게 된다.

<서로에게 필요할 것 같은 물건 3개를 선택해서, 트렁크에 가져오기>

이때부터 그들의 트렁크 속사정은 달라진다. 

* 그 남자 그 여자의 트렁크 속 열기

그들의 여행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남자, 그 여자가 오랜 시간동안 조율하고 생각하고 이야기 나눈 여행지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기로 암묵적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 곳’을 알 길이 없다. 단지 우리는 그 남자, 그 여자가 함께 하고 있는 여행지가 그들에게는 낯설고도 익숙한 소리를 내는 곳이라는 것 밖에는 모른다. 그들만이 아는 여행지 이니까.




#. 3가지 물건 - 그 여자 편. 

1. 음악




그녀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앨범을 잡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음악인 ‘정원영’ 씨의 음악은 지금 그녀와 여행을 떠나기에 매우 충분한 조건이었다. 버클리 1세대의 음악인으로써 그녀가 듣는 그의 음악은 쉽게 따라 부를 순 있지만, 막상 마이크를 잡고 부르기엔 뭔가 어색하고 어려운 부분이 있는 묘한 매력이 있는 퓨전째즈 음악이다. ‘정원영’ 씨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음색은 그녀를 그의 음악으로 한 발짝 다가 갈 수 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그녀는 그의 음악 중 ‘가버린 날들’ 이라는 곡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가까이 있어도 건널 수 없는 그대, 나를 불러 손짓하고 또 떠나가네.~’ 라는 가사는 언제나 ‘그 남자’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뭔가 알 수 없는 그 남자만의 기류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2. 액자




그녀는 익숙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기에 그녀는 주저 없이 자신의 집 탁자 위 액자를 트렁크 안에 넣었다. 사실 그 남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나름 둘러댈 재간이 있었다. 그녀는 파리의 후기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을 유난히 좋아하는데, 산업혁명으로 오염된 서양문명에서 벗어나 순수하고 소박한 타히티 원시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들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때론 열대의 강렬한 색채와 원시인들의 건강하고 순박한 모습의 그림들이 그녀를 설레이게 만들었다. 언젠가 한번 그 남자는 이 액자를 보며 꽤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그녀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없음에 가슴이 찌릿찌릿 아팠지만, 이번 여행에서 다시 한 번 그에게 보여줌으로써 공감하길 기대해 보려는 취지에 굳은 의지를 갖고 트렁크 안에 넣어 왔다. 그의 반응은 이미 예상되지만, 1% 변화의 희망을 안고. 

3. 책



 그녀에게는 어설픈 소원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 남자에게 책을 읽어주는 여자’ 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지인들 모두 그에게 “아서라”를 외쳐대며 코웃음 쳐댔었지만, 그녀는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스무 살 무렵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녀의 상상 속에 있었던 일이 소설로 나와 그녀의 손에 고이 안착되어 있었으니 그녀는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흥분했던 것.

목소리가 좋기로 인정받은 여자 주인공 ‘마리 콩스탕스’는 지역신문에 책을 읽어주는 여자로 광고를 내고, 그 광고를 본 다양한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면서 생기는 일들을 일목요연하고 흥미롭게 다루는 책이다. 이 책은 마리 콩스탕스가 읽어주는 몇 권의 ‘책’ 들이 나와, 한권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을 수도 있는 장점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 그녀는 많은 것들을 홀로 착각하고 또 착각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녀 나름대로 꽤 진지했기에, 그 누구도 그녀에게 불성실한 눈빛을 보낼 수가 없었다. 책을 읽어주는 여자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남자에게’ 책을 읽어주는 여자가 되기는 사실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 남자는 누군가 자신의 귀에 대고 문장을 읽기 시작하면, 그 순간 비눗방울 같은 방울들이 콧망울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깊고 느릿한 숨소리가 코에서 흐느껴대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들자, 그녀의 트렁크 가방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3가지 물건 - 그 남자 편. 

1. 음악




그 역시 그 여자에게 필요할 것 같은 물건으로 음악을 선택했는데, 그 여자와 달리 손에 잡히는 대로 앨범 하나를 넣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그가 소유하고 있는 앨범은 모두 최고의 선택들이었기에, 아무거나 넣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Pat Metheny' 임을 트렁크 안에서 확인한 그는, 여간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그 여자가 이 앨범을 보고 환호할 것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가 팻의 음악을 처음 접한 때는 야근을 하던 때였다.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서 흘러나오던 ‘Are you going with me?’ 을 듣게 되던 순간이었다. 그에게 이 음악이 여행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심한 휴식에 대한 갈증과 더불어, 열망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그는 질리도록 이 곡만 들었고, 우연히 보게 된 (원래 인생은 우연히 흘러가기 마련 아닌가) 아네스 자우이의 ‘타인의 취향’에서 그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Au Lait’가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한 동안 팻의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그 여자가 이 음악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지만, 그에게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행복한 비명을 질러대며, 그에게 안기겠지. 

2. 라디오




그는 그 여자에게 필요할 것 같은 두 번째 물건으로 ‘라디오’를 선택했다. 무언가에 열중할 때, 혹은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에 들어도 나름의 충족감을 주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가져 오는 데는 무거움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침대 협탁에 올려놓으니 제법 그림이 나왔다.

늦은 새벽시간 ‘이상협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거나, 그에 어울리는 클래식 선곡이라도 나올라치면 그 새벽은 황금의 시간이 되어버린다. 조용히 스탠드를 켜놓고, 작은 작업이라도 하게 될 경우 라디오는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 해도 괜찮은 멋진 친구 말이다. 쓸데없는 말이 필요 없어도 되고, 가끔 같이 이 새벽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 문자로 사연을 보내 새벽에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인사도 주고받으니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그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그 여자에게는 이 라디오가 가장 적절한 물건 같아 보였다.  

3. 메모장과 필기도구




오래 전부터 그에게는 습관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디서나 ‘메모’ 하는 습관이었다. 신문이나 책이나, 심지어 광고까지 그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문구는 무엇이든지 적었고, 때로는 그가 느끼는 감정까지도 세밀하게 기록해 두었다. 그 여자에게 건네줄 마지막 물건은 메모장과 필기도구였다. 이미 그가 몇 개 기록해 둔 메모장이지만, 맨 첫 장부터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으면, 메모하는 습관이 길들여 지지 않은 그 여자에게는 어려운 일일 것만 같아,(때로는 강요로 보이겠지.) 그가 몇 글자 낙서 식으로 자연스럽게 써놓은 메모장을 건넬 생각이다. 이번 여행에서 그 여자는 어쩌면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훗날 그 여행지를 기억하면서 메모장에 기록해 놓은 감정을 살펴보게 되면 아마 더 좋은 기억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이상한 글이라도 써놓았는지 한 번 살펴보던 중 그는 자신이 낙서 비슷한 글로 써놓은 글을 보고 재빨리 지우개로 지웠다.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 내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야 하는 그녀의 마음이?’

라는 글과 함께, 그 여자의 악마 같은 성난 얼굴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행지에서 필요한 필수품목으로 지우개를 빼놓으면 안 된다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 그 남자 그 여자의 트렁크 속 다시 열기

 그 남자 그 여자가 서로에게 주고받은 세 가지 물건으로 여행은 예상했던 것 보다 한층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서로 받은 음악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감미롭게 보낼 수 있었고, 그 여자에게 그 남자의 라디오가 늦은 새벽이나 요리할 때 요긴하게 사용되기도 했었다. 더불어 메모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 훌륭한 물건으로써 이것저것 정보를 적을 수도 있었고 나름 추상화 같은 그림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그 여자는 뭔가 지운 흔적이 보여 햇빛에 메모장을 비추며 무슨 글자가 있었었는지 이리저리 훑어보기도 했다. 그 여자가 건네 줬던 물건은 그 남자에게 예상된 물건이었기에 그 여자가 없는 곳에서 낮은 하품을 해댔었지만, 그림액자를 침대 협탁에 올려놓으니 마치 그 여자의 집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낯선 호텔방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으므로 꽤 괜찮은 물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 책이었는데, 혼자 읽으려고 그 여자에게 매달려 말을 해보아도 그 여자에게는 막무가내였다. 그렁그렁 눈물마저 보이는 그 여자에게 손을 든 그 남자는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긴 의자에 가만히 누워 그 여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생각했던 것 보다 재밌는 책이어서 혼자 조용히 머쓱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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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트렁크를 다시 열어보는 그 남자 그 여자.

그 남자는 그 여자가 건네주었던 물건들이 아직 그 남자의 한쪽 서랍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여자는 그 남자가 그 여자를 생각하며 건네주었던 물건들이 아직 트렁크 안에서 쉬고 있었다. 몇 년이란 시간이 흘러갔지만, 트렁크 속사정은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단지 새로운 여행을 하기 위해선 이 물건들을 부득이 하게 꺼내야 하는 것 외엔.

그들은 새롭게 떠나는 여행지를 위해서 트렁크를 다시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라지는 트렁크 속사정에 대해서 이번만큼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미소를 지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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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훈(htlaz) 2024-04-28

라디오가 멋집니다! 잘보고갑니다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