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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에 관한 8가지 에피소드



봄이 되면 갖가지 꽃이 피어나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설레게 하는 것은 벚꽃이 아닐까 합니다. 어린 시절엔 벚나무에 얽힌 괴담과 민족사의 아픔을 상기시켜주는 적국의 꽃이라는 이유로 애써 외면하기도 했지만,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고집스럽게 아름다운 유희를 즐기지 못하는 것 또한 그들이 남겨놓은 다른 모습의 아픔이 아닐까 싶네요. 4월의 포토에세이는 줄 선 코세니아 분들의 원성을 뒤로 하고, (마침 남아있던 지난 봄의 일본여행 사진을 ‘8가지 장소의 벚꽃사진’으로 추려) 독단적으로다가 웹진 담당자의 마음대로 ‘벚꽃만 보고파 한 맺힌 짐승인양’ 질리도록 벚꽃 사진을 올려보려 했습니다...만, 스크롤의 압박으로 줄이고 줄여 (인정 못할) ‘적은 양’으로 마감해봅니다.(훗훗) 이리 길어봐야 정지된 순간의 영상으로, 흩날리는 벚꽃 잎의 생생한 아름다움을 얼마나 표현해낼 수 있겠습니까마는... 4월, 안팎으로 멀미나게 꽃놀이 즐기시라고 누구의 호응도 없는데 설레어 진행해봅니다. (참고로, 길다란 대륙을 길죽한 열차로 느리게 종단하는 일은 누구에게랄 것 없이 권하고 싶은 퍽이나 한적하고도 고요한 여행이었습니다. 나비떼처럼 쫓아오던 벚꽃 잎의 동행과 더불어.)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나보다고 했던가, 여러송이의 벚꽃을 피우기 위해 지난 밤 폭풍우는 그렇게도 모질게 창문을 후려친 모양입니다. 쓰나미 경보가 내리던 태풍 속에서 아타미 해변과 대치상황 중이던 제가 그토록 궁금해 하던 '바다가 비를 맞는 순간'을 처절히도 지켜보았을 때, '바다와 비가 만나면 사이다 소리가 나는구나' 끄덕대며 밀려밀려 어딜봐도 아름다운 이즈반도의 손톱만한 해안가마을 이토역에 도착한 것은 태풍이 야자수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패대기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면초가라 어쩔수 없이 앞이 보이지 않는 폭풍우 속으로 (부러진 우산을 애써 잡으며) 초연히 걸어나가 젖은 생쥐 꼴을 뛰어 넘어 스펀지 그 자체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였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니아니, 온몸을 애써 짜낸 후 온천수에 몸을 담그며 ‘좀 살만 하구나’ 했을 때만해도, 것도 아니아니, 간 밤 그 강한 태풍이 나를 캔사스 외 딴 시골마을에 데려다 놓는 건 아닐까 꼬박 뜬 눈으로 지샌 그 아침 까지도. 잠잠해진 세상에 보송한 기적이 피어났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성난 밤이 겸연쩍게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르른 하늘을 내보이던 정오, 일본에서의 첫 벚꽃을 마주했을 때의 기쁨은 말 그대로 온 몸에 개화_





삼량정도 됐을까, 작은 시골 전철을 타고 오카야마에서 우노로 가는 길은, 흡사 앤이 매튜를 만나 ‘사과나무 길’을 지나며 '기쁨의 하얀 길'이라 부르겠다던 감동의 구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나오시마 섬을 목적으로 우노항으로 가는 방법은 버스와 전철 둘다 가능하지만, 누군가 ‘나오시마를 가겠다’ 한다면, 오래된 작은 전철에 앉아 창문 어귀를 쓸듯 말듯 살랑대는 안타까운 손짓들을 한껏 바라볼 수 있는 이 길을, 잠시 정차역의 바람이 일면 꽃잎과의 짧은 만남을 기분좋게 즐길 수 있는 길죽하고도 리듬있는 바로, 이 길을 권하고 싶네요. 예술의 섬, 나오시마로 가는 길은 우노항에서 부터가 아니라 이곳, 벚꽃레일에서부터라고 생각하니까요. 






한적한 공기를 가진 히로시마의 옹골찬 벚꽃잎들과 오손 도손 모여 앉은 사람들을 보고있자니 두고 온 사람들이 생각났더랬습니다. 벤치 한켠을 비워두고 작은 바람들이 꽃잎을 간지럽힐 때면 비워둔 자리에 하나, 둘 사람들을 채워보았는데, '그래, 꽃놀이는 혼자 할 수는 없지. 돌아가면 네모난 돗자리를 펴고 한껏 이야기를 나눌테다' 라는 생각과 "보고 싶다, 보여주고 싶다"라고 중얼거리던 순간들이 모여 꽃이 되기도 하고, 바람이 되기도 하고. 크지 않은 쉼, 적당한 호흡, 짧은 웃음, 곧 흩어질 삶들이 한데 모인 소소하고 낭만적인 어른들의 놀이가 있던 히로시마였습니다.




 
일본의 봄은 아름답지만 왜 이리도 비가 많이 내리는지... 운동화가 바싹 마를 틈도 없이 축축한 발자욱을 남긴 것이 여러 날. 빗속의 아사히 강변길은 가득매운 벚꽃과 어울리지 않게 공허해 음악을 틀수밖에 없었는데, 움켜진 손안으로 전해지던 빗방울들의 미세한 진동과 귀를 간질이던 작은 이어폰, 꽃비가 내리던 풍경에 이끌려 가만가만 걷다보니 어느덧 고대하던 고라쿠엔에 다다랐습니다. 일본의 3대 정원 중 하나로, 거대한 스케일과 절제된 미, 기묘한 구성의 회유식 정원인 고라쿠엔은 제법 굵은 빗줄기에도 걸을만했는데, 탁 트인 전경의 대공간을 지나서 개천을 따라 걷다보면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의 ‘벚꽃섬’을 만나게 됩니다. '근심을 먼저하고, 나중에 즐거움을 누린다'는 정신아래 조성됐다는 고라쿠엔의 참맛을 느끼는 순간! 거대한 고목의 웅장함, 거기에 더해지는 작은 벚꽃잎들의 고고함이라니. 감동과 비로 한껏 축축해진 몸이 지쳐 쓰러진 다음날, 객실에 펴놓은 우산 주위로 파다한 마른 벚꽃잎을 보니, 지난날이 꿈이었나 싶었습니다. (우산위로 수없이 달라붙었다 떨어져갔을 꽃잎을 상상하자니 투명우산이 아닌게 어찌나 안타깝던지.) 비오는 날에는 투명우산을 쓰고 벚꽃 길을 걸어보세요. 꿈인가 싶은 몽환적인 꽃비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제게는 히메지 하면 절로 '맑은 날의' 수식어가 따라옵니다. 긴긴 축축함에서 벗어나 쾌청한 아름다움이 시작된 곳이어서 그랬을까요, 밝은 빛이 꽃잎사이로 맑게 투과 되는 모습이 상쾌해서 그랬을까요? '누구라도 다 수용하겠다' 넉넉한 규모를 가진 히메지성은 과연 세계문화유산에 걸맞게 시각적, 공간적, 구조적 어느 모로나 아름답습니다. 너른 광장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도 혼잡스럽지 않을 여유를 부리고, 벚나무는 누구라도 꽃그늘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는양 자애롭습니다. 햇빛을 한껏 머금은 벚꽃잎들 아래로 분주하게 환한 사람들이 지나가면, 왕왕 왁자지껄하기도 하고, 지그재그로 달리기도 하지만 혼란의 모습도 전체 고요함의 일부가 되는 것이 신기합니다. 히메지성이 갖고 있는 고유한 기품이 도시 전체를 감싸 안고 있어 화려하게 피어난 벚꽃에도 고상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어디하나 빼먹을 곳 없이 아름다워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만개한 히메지’는 제게 최고의 ‘벚꽃 풍경’입니다.

 




교토의 꽃은 낭만적입니다. 뭐, 개인적인 표현으로는 화려하지만 지저분하고, 정신사납지만 생기발랄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조용한 내면의 시간을 갖고자 온 교토라면 봄의 방문은 절대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꽃바람 부는 철학의 길만큼은 권하고 싶습니다. 꽃잎만큼 많은 사람에 치여 공간각은커녕 소음과 신체마찰의 불쾌감 같은 것도 잊게 할 만큼 매력적이니까요. 바람에 날리는 꽃잎이 공기 중을 밀도있게 비행하다 비와코 수로를 채우는 장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벚꽃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의 꽃같은 모습도,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탄성들도 이곳에서만큼은 시끄럽지 않습니다. 꽃잎인양 거니는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과 날리는 꽃바람 속에 '봄날의 눈'을 만나며 안녕할 수 있다니, 세상에 이렇게 찬란한 헤어짐이 어디 있을까요.




꽃잎이 떨어지고 군데군데 옅은 초록빛 잎사귀가 사슴의 귀처럼 귀엽게도 올라올 즈음, 마지막 꽃잎을 즐기며 나라를 거닐었습니다. 나라는 어디를 가도 이 귀여운 사슴들을 만날 수 있는데, 사슴들은 어쩐지 벚꽃과 닮은꼴입니다. 나라공원은 곳곳에 아름다운 벚나무들이 즐비하지만, 와카쿠사산 정상에서 ‘나라시내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고목의 벚나무들’이야말로 으뜸이라 생각합니다. 가스가야마 원시림을 거쳐 정상에 온 후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경우 잘 조성된 초원같은 산책로를 거쳐 30분만에 와카쿠사산의 정상으로 오르는데, 저의 경우 박복한 감(感)을 타고나 홀로 멀고 험한 원시림을 거쳐 3시간 만에 도착! 내려올 때의 가슴 뜨신 허망함이란... 그래도 초원의 길은 오름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아름다운 건 틀림없다 생각하며, 하산의 감동은 두 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 오름길이 더 아름다워’한다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역시 벚꽃은 ‘일본의 사쿠라야’ 절로 수긍이 되던 시간들을 거치며, 오랜 기간 국가의 꽃으로 사랑받아 자라온 (축적된 시간을 양분삼아 지니고 있는) 그네들의 아름다움이야 비교할 수 없이 최고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일 좋아하는 벚꽃 길을 묻는다면, 동네 근처에 있는 테미공원을 말하고 싶네요. 벚꽃이 개화하는 밤, 그 작고 동그란 동산이 해파리처럼 동동 떠오르는 모습은 언제보아도 웃음나게 귀여운데, 고등학생 시절 야간 자율학습하던 창 너머로 슬그머니 해파리가 올라올 때면 대학이고 뭐고 창문턱에 하릴없이 매달리곤 했습지요. 만개한 테미공원으로 들어서면 벚꽃잎으로 이루어진 돔구장에 와있는 듯도 하고, 꽃지붕을 얹어놓은 집안에 앉아있는 듯도 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굵은 밑동이 가진 위엄은 없지만, 마디마디 하늘을 가려보겠다고 뻗어 나온 가는 가지들이 뽐내는 연약한 아름다움이란... 어쩐지 벚꽃은 연약한 게 제 맛 아닌가요? (훗훗) 남겨놓은 사진이 없어 2006년의 저화질 카메라 사진을 꺼내왔지만, 실제로는 더 아름답다는 변명을 해봅니다. (미안하다, 해파리 숲아)



벚꽃이 4월의 어느 꽃보다 사랑받는 건, 어떤 풍경과 상황에도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야기 거리’를 다른 말로 하면 ‘추억’정도 될까나...) 누구나 자신만의 벚꽃 명소가 있으리라 생각이드니 궁금해집니다. 그 벚꽃 이야기~ 저처럼 그냥 그럴지도 모를 이야기라도.(웃음)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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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벚꽃 명소가 많지만 벚꽃 만큼이나 북적이는 인파로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평화롭게 감상할 곳은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까울 때도 있죠ㅠㅠ그래도 사진으로나마 만난 벚꽃의 나라 일본은 역시 감탄에 마지 않네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허락없이 오른쪽 마우스를 꾸욱:D 멋진 사진 잘보고 갑니당!

르네상스 공돌이라는 옆방지기 전창훈입니다. 벗꽃이 너무 예쁘군요. 서양에 오래 살다보니, 일본풍경이 참 독특해서 너무 가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일할 기회가 오면 자주 가보려고 합니다. 뭔가 자연속에 자연스런 인공이 살짝 가미된 느낌을 주는군요. 잘 봤습니다.

이거 코센에 걸긴 좀 아까운데요. ㅋㅋ
사진도 멋지고 글도 아름다운 포스팅입니다.
나라의 사슴이 아주 귀엽네요.
덕분에 봄꽃놀이 다한거 같습니다. 지는 벚꽃이 좀 덜 아쉬울듯....^^

비가오는 날 봄꽃구경 못하겠다 싶었는데 투명우산을 쓰고 걸으면 그 나름 벚꽃길을 즐길 수 있겠다 싶네요ㅎ 그리고 만개한 히메지 성 전경은 정말 아름답네요. 그리고 일본에 가면 기모노 의상을 입은 여인들을 많이 볼 수 있나요? 홍홍 예쁘네요. 저도 오늘 카이스트 벚꽃 만개 길을 바람과 함께 거닐어 보렵니다. ㅎ

frv0906님의 투명우산을 꽃집에 버리고 온 아픈 과거가 생각나는군요.
미안해서 어쩌지요.ㅜ.ㅜ

일본에 있을 때가 생각이 나네요..역시 벚꽃 필때쯤되면 대학생들 졸업하는데(한달 정도 한국과 차이가 있음) 그때 여학생들 키모노 입고 졸업 사진 찍는다고 다니는 거 보면 정말 이뻤었는데..^^;;

전창훈박사님, 정확하시네요~ 자연스런 인공미가 일본 관광자원의 최대 힘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적절히 분배할 줄 아는 방법 하나만도 감탄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네~ 일본에는 기모노 입은 여인들을 자주 볼 수 있지요~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한복입은 풍경이 사라졌는지 아쉽네요. 예전에는 종종 볼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