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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저

활자를 여가에 선용하는 비율이 현격히 낮아진 요즘 덩달아 누군가와 책을 나눌 기회가 드문 시절에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신 KOSEN과 저에게 KOSEN을 소개해 주시고 릴레이북 코너에 동참할 기회를 주신 김윤희 박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KOSEN은 처음인 저는 미국의 메릴랜드주에 있는 University of Maryland에서 박사후 과정으로 식물 RNA 바이러스를 이용한 식물병 방제와 식물의 유전자 발현 조절 및 바이러스 RNA의 2차원적 구조의 기능에 관한 연구를 하는 장찬용이라고 합니다. 지면을 빌어 KOSEN 여러분께 반갑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책을 소개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소개와 같지 않을는지요.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데, 책은 여러 의미로 사람을 반영한다 하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책장을 보면 온통 되고 싶은 제가 있습니다. 여전히 미완인 채 놓지 못한 꿈들을 품고 살기에 하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소망이 온통 책장의 책 제목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책 한 권 읽는다고 그 모든 꿈들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지만, 읽은 페이지만큼 그렇게 쌓인 책만큼 조금이나마 내가 바라는 나에게 다가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희망, 책이란 저에게 그런 희망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책장엔 어떠한 제목들이 아로새겨져 있는지요?
 

 ‘나는 얼마만큼의 임금과 처우를 받아야 적정한가?’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이 공공연한 사회에서 다소 기괴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질문을 꽤나 오랫동안 달고 살고 있습니다. 상당히 성가시고, 골치가 아픈 이 질문의 근원은 빈번히 우리가 뉴스를 통해 듣게 되는 사회 필수 노동인력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와 ‘나’의 관계에 있습니다.

전철을 보수하던 고졸 청년이 전동차와 스크린 도어 사이에 끼어 숨졌다, 22세 청년이 마트의 냉동기 점검을 하던 중 질식사했다, 농사일을 하러 온 30세 여성 이주노동자가 한파로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숙소로 사용되던 비닐하우스 안에서 숨졌다는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이고, 저들은 무엇인데 왜 내 삶은 저들에 비해 이렇게 안온한 것인가? 운 좋게 오랫동안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저는 지금 (특수고용 비자를 통해 일을 하는 이주노동자이더라도) 노조와 노동법에 의해 보장되는 임금과 휴식, 여가, 안전에 대한 권리를 충분히 누리고 있지만 실상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삶의 요소인 의, 식, 주에 관련한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물가 안정’과 ‘시장경쟁’이라는 미명하에 체계적 빈곤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앞서 김윤희 박사님께서 소개하신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에서 나오는 계획된 빈곤과 맥락이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학문의 탑에 웃돌 하나를 놓는”, 혹은 “미래 인류 기술 발전에 이바지하는” 등의 그럴싸한 문구로 포장되는 제가 지금 하는 일들이 과연 당장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고 입히며,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인가를 반문하면 일터에서 사그라져버린 누군가의 생명을 목도하는 것은 꽤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내 삶의 평안함은 결국 누군가의 사회구조적 희생을 통해서 확보되고 있는 현실에서 나는 그저 이렇게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근대 역사 이래로 거의 모든 위정자들이 빈곤을 퇴치하고 평등한 세상을 구현하겠다고 선언해왔고, 내 주변의 다정한 지인들은 그리도 강력하게 세상의 정의와 평등에 대해 외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들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품고 2022년까지 삶을 이어온 저에게 꽤나 수긍이 가는 답변을 준 것이 1936년, 탄광 지역을 헤매었던 조지 오웰과 그 결과물인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 부는 총 7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지 오웰이 당시 대공황 상황에서의 심각한 실업상태에 빠진 잉글랜드 북부의 탄광촌을 취재한 르포르타주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2부는 총 6장의 구성으로 당시 사회주의를 시민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보았던 조지 오웰의 당대 사회주의를 오역하는 사회주의자 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제국주의와 계급 주의에 부역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기반성이 동시에 담겨 있는 자전적 에세이 형식의 글입니다.

1부는 꼼꼼한 묘사와 세세한 기록이 있는 보고서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탄광 노동자에 대한 경외와 예찬, 그리고 그들의 고된 삶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는 연서와도 같습니다. 1부를 통틀어 조지 오웰은 광산 노동의 중요성과 광부들의 역할, 그리고 만성적인 빈곤에 갇혀있는 광부들의 삶의 모습, 공황에 따른 대규모 장기 실업 상황에서 광부들이 겪는 시련, 그중에서도 특히 주택문제와 실업급여 등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 책은 끝까지 붙들고 갈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주었던 1부의 2장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1부 2장은 오웰이 직접 갱도에 들어간 경험과 거기서 만난 광부들의 에너지에 대한 감동, 그리고 그들의 수고를 향한 부채감에 대한 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문명의 기반은 석탄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해당 장은 “서구 세계의 신진대사에서 석탄 광부보다 중요한 존재는 땅을 일구는 농부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석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석탄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좀처럼, 또는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는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자괴감을 느낄 만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지식인’ 으로서의, 전반적으로 우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지위를 의심하게 된다. 적어도 지켜보는 동안에는 우월한 인간들이 계속 우월하기 위해서는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야만 한다는 자각을 똑똑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저는 이것과 유사한 감정을 가을 논의 추수 현장에서 느끼곤 합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실로’ 땅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 등의 문장을 통해 한 세기가 지난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사회 다수의 필요에 의해 구조적인 착취 상태에 놓여있는 저임금 노동의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따금 뉴스를 통해 접하는 “너 열심히 공부 안 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는 어긋난 교육철학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방향이 그러한 노동자를 향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지를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에세이 형식의 2부는 한 단어로 소개하자면 조지 오웰의 자기 고백과 당대의 엇나간 사회주의자에 대한 냉소를 통해 저에게 선사한 “명존쎄” (주: “명치를 X나 쎄게 치다”의 줄임말)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물농장과 1984를 통해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를 힐난했던 당대 비판적 지식인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지 오웰은 어울리지 않게 인도에서 제국경찰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 경사 정도가 되겠습니다.)로 5년을 복무했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인해 얻게 된 “모든 피압제자는 옳다.”라는 신념으로 인해, 그의 시선은 당시 영국의 무산계급으로 향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글 중, 그는 “제국주의를 혐오하기 위해서는 그 일원이 되어봐야 한다.”라고 했고, 그 ‘제국주의’를 ‘식자 사회’로 치환해 본 저는 곧 고개를 끄덕거리며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여러모로 저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문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명존쎄”에 부합하기엔 모자랍니다. 저는 앞서, 대다수의 사람이 평등과 정의를 부르짖음에도 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누군가를 구조적 빈곤으로 몰아넣는가에 대한 질문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이 모든 부조리의 원인은 소수의 ‘악한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규정 짓고 있었습니다. 조지 오웰은 2부의 많은 부분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과 동시에, 그 질문에 머무른 채 나름의 책무를 하기 위해 노력(이를테면 기득권 욕하기)하고 있다고 자위하는 제가 얼마나 위선적이지를 다음의 문장들을 통해 간파해냅니다.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는 있되,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내가 계급 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차별의 산물이다.” 이러한 문장들을 접하며 막연하게 머릿속에 떠돌던 관념들이 활자화되어 정리가 되니 스스로의 모순을 대면하게 되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지인들과의 차담 중에, 혹은 불콰하게 취한 잡담 중에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논하면서 당장이라도 우리가 분연히 일어나면 세상 모든 게 단번에 바뀔 것처럼 얘기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그 저변에는 그것이 절대로 쉽게 바뀔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당장의 비근한 예로, 농업현장에서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농학자인 저의 근로 소득을 제한다고 하면 얼마나 기꺼이 제몫을 내어 놓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한없이 비겁해지는 제 자신을 볼 수 있겠지요.

이 밖에도 조지 오웰은 2부를 통해, 엘리트주의와 출세욕을 사회주의 이념을 통해 누리려는 가짜 사회주의자에 의한 사회주의의 오염을 비판하며, 그로 인해 사회주의가 지지 받지 못하는 현실, 나아가 사회주의자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파시즘의 태동에 대한 경고와 그에 대한 자신이 생각하는 해결책을 명쾌한 통찰과 대다수의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냅니다. 개인적으로 조지 오웰이 사회주의가 일반 대중에게 지지 받지 못하는 이유를 사회주의자로 꼽는 것과 유사한 기작으로 과학이 대중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과학자 때문이 아닌가라는 자기반성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조지 오웰은 당대 사회의 탈출구로 사회주의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사회주의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역자에 따르면 이 책에서 말하는 조지 오웰의 사회주의는 급격한 혁명적 사태의 선동이나, 사회주의적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닌 “인간다움” 과 “상식적 양식”에 기반한 무엇이라 합니다. 이러한 모호한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정의는 명시적인 교조주의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이후 스탈린주의를 풍자함으로써 세간에 유명해진 그의 차기작인 동물농장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해석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나와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사는 세상은 마냥 아름답기를 바라는 게 일반적인 마음일 것입니다. 어쩌면 생득적으로 주어진 일정한 경계 내에서 각자의 층위적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여러모로 윤택한 삶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조지 오웰이란 사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기 위해 북부의 탄광마을 속으로 걸어갔으며, 그곳에서 직면한 현실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분석과 현실 참여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책은 저에게 되고 싶은 나의 단편으로서 의미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저에게 참으로 마음 뿌듯한 책이라 소개하겠습니다.

조지 오웰은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이 책을 통해서 말합니다. 볕 좋은 세상의 온기 있는 빛을 램프 빛 희미한 세상과 나누는 것에 대한 고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한 번쯤 한 세기 전의 실천적 사회주의자의 경험과 말에 귀기울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과 1936년에 탄광촌에서 그가 보았던 현실이 2022년을 사는 지금의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저의 견해와 함께 조심스럽게 여러분들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추천 드려 봅니다. 사실은 코비드-19에 확진 되어 격리가 된 상태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이로서 대박이라고 할지 쪽박이라고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갇힘에 무료한 인간은 말이 많아졌습니다. 잡문이 길어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독일의 BioMed X institute의 Team TMI 에서 research group reader로서 역할을 하시며, 단백질 신약과 같은 "고분자 치료물질"의 경구투여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관(腸管) 내의 새로운 전달 방법을 연구하고 계시는 김경보 박사님께 다음 주자로서의 역할을 부탁드려 봅니다. 제가 박사학위를 하던 University of Kentucky에서 알게 된 김경보 박사님은 “아~~! 저런 사람이 과학을 한다는 것은 우리 세대에 큰 복이다“라는 경외감을 갖게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김경보 박사님을 지목한 이유는 일종의 관음과도 같다고 고백해 봅니다. 저토록, 겸손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무엇을 물어봐도 막힘없이 답을 주고, 문제 앞에 헤맬 때는 질문의 방향부터 다시 잡아주는 통찰을 지닌, 그야말로 척척박사인 저 사람은 어떤 책을 읽고 사유하는지 항상 궁금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 비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되어 마냥 기쁘고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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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훈(htlaz) 2022-04-10

코로나 확진, 격리 등으로 힘드셨겠습니다. 격리 기간 중 소개 글까지 써시고. 제 개인적으로 조지 오웰 작가의
사상은 반갑지 않은 작가이나 소개하신 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기억해 두고 도서실에서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