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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뺏기 (이달의 주자:한재각) 스테파노 리베르티 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한재각입니다.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했지만, 최근 멀고 먼 길을 돌아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과학기술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과학기술사회학을 공부했으니, 과학기술 분야와 아주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제가 일하는 에너지기후 분야를 비롯하여 여러 분야의 과학기술자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하는 점이 많기도 하고, 그 만큼 아쉬움도 많아서 가끔 논쟁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어쩌다가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이라는 자리에서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창당한지 3년이 갖 지난, ‘녹색전환’이라는 커다란 화두를 가지고 있는 작은 정당입니다. ‘녹색전환’은 과학기술의 지혜를 통해서 길을 모색할 일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을 자양분으로 삼기도 하는 일입니다. 당장 눈앞에 놓인 노후 핵발전소의 폐쇄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서 과학기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학과 민주주의가 공존하고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상추와 토마토를 키우겠다는 지인은 흙을 담을 스티로폼을 구해 두었으나, 흙은 어디서 구해야 할지 난감해 하고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한 마디씩 거듭니다. 야산의 부엽토를 퍼오는 것이 최고라는 사람도 있었고, 벌레가 낀다고 그냥 꽃집에서 영양토를 사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먹거리를 키우기 위해 흙을 필요로 하지만, 그 흙은 더 이상 땅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수경재배에까지 생각이 도달했습니다. 점점 땅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먹거리 이야기가 흥미롭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괴기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먹거리를 키우는데 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작물들이 여전히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먹거리를 생산해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흙은 단순히 물리적 · 화학적 요소들의 결합체를 넘어 생태학적 · 지리학적 · 사회학적 · 경제학적 · 지리학적 복합적 실체인 땅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땅은 먹거리 생산의 장소뿐 아니라, 에너지의 생산 장소로 탈바꿈하고 있기도 합니다. 땅 아래에서 석유 등을 퍼올리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서 옥수수나 팜나무 등을 재배하여 바이오 연료를 얻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땅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중요하며 대체하기 어려운 요소이며, 그렇기 때문에 땅의 소유 · 통제 · 관리 문제가 여전히 정치 · 사회 · 경제적 핵심 쟁점이 됩니다.

최근 <땅뺏기>(스테파노 리베르티 지음, 유강은 옮김, 레디앙, 2014)라는 책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이탈리아 신문사 기자가 에티오피아, 사우디아라비아, 제네바, 시카고, 브라질, 탄자니아의 대규모 농장, 정부 사무실, NGO 집회, 국제 회의장, 농촌 마을 등을 방문하여 쓴 르포입니다.

‘land grabbing’의 번역어로 선택된 ‘땅뺏기’는 누구로부터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일까요? 저자는 오일달러는 풍부하지만 식량을 생산할 땅은 부족한 중동의 산유국에 먼저 눈을 돌립니다. 사우디아라바아의 왕자들은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로부터 거대한 땅을 장기 임대하거나 구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제네바의 국제 회의장과 시카고의 곡물 거래소를 방문하여, 고수익의 안정적인 투자처를 찾으려는 자본가와 그 대리인들을 인터뷰합니다. 2007-8년의 세계 금융위기 이후, 수출용 식량과 바이오연료를 생산할 수 있는 해외 농업투자는 인기품목이라고 합니다.

식량안보 혹은 자본투자를 위한 대상이 되는 땅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자가 방문한 에티오피아와 탄자니아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땅이 대부분입니다. 자국 국민들은 굶주리지만 부유한 국가들의 상점 진열장에 놓이게 될 작물을 생산하도록 땅을 장기 임대하는 가난한 나라들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새로운 식민주의 현장을 여행하다”로 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그 식민주의는 국가 간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저자는 브라질처럼 한 국가 내에서도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존의 광활한 밀림이 불태워지고 불도저로 파헤쳐진 후 콩과 같은 수출용 작물이나 바이오 연료용 사탕수수가 경작되며, 그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온 원주민들은 ‘게으른’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러한 ‘땅뺏기’는 우리와 무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2008년에 아프리카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의 정부가 전체 농경지 절반(130만 헥타르)을 한 해외기업에 99년간 무상으로 임대하는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진 후 대규모 시위가 촉발되었고, 170여 명이 사망하고서야 마다가스카르의 대통령은 권좌에서 내려왔습니다. 한 정권의 운명을 바꾼 그 계약의 상대편은 한국 국적의 대우로지스틱스였습니다. 한국 정부는 “해외 식량 기지 확보” 정책을 통해서 이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과학기술자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과학기술자 이전에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으로서 이러한 부정의―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에 대해서 항의하고 바로잡아야 할 권리와 책임이 있겠지요. 나아가 이런 쟁점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과학기술자들에게는 직업적인 차원에서 고민―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 문제―을 유발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방문한 탄자니아에서 이루어진 ‘땅뺏기’는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온실가스 배출감축 노력과 연계되어 있기도 합니다. 대기 중에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대기 중 농도를 낮춘다는 구상 아래에 숲 조성 사업을 진행하거나, 탄소중립적인 액체연료를 위해서 자트로파와 같은 작물을 재배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땅은 지역 주민들이 오랜 역사 동안 소유하고 생계를 이어가던 터전이었으나, 이제는 해외 기업들의 소유가 되어 더 이상 접근하기도 힘든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최소한의 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온실가스 흡수원으로 조성되는 해외 산림 사업과 관련된 분야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기후변화라는 전지구적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해외 산림조성 사업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열정어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후정책을 연구하는 저로서도 그런 사명의식과 열정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연구자들의 활동이 이 책이 다루는 ‘땅뺏기’와 어떤 식으로든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닐지 걱정스럽습니다. 관련 분야의 연구들이 주목받고 또한 연구개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배경과 이런 ‘땅뺏기’ 현상이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비교적 널리 받아들여지는 인식처럼, 과학기술 활동은 ‘사회적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연구 의제가 선정되고 또 그것에 연구개발비가 투자되는 것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인 배경과 맥락을 제거하고는 이해하기가 힘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효율성과 경제적 성과를 강조하면서 다른 사회적 가치는 부차화하는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와 과학기술활동이 단절되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실 연구 현장의 과학기술자들은 연구개발이 어떤 맥락과 배경에서 이루어지며 그것이 어떤 영향에 대해서 야기할지를 속속들이 파악하기도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연구 현장의 성과주의 경쟁 등으로 인해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 문제에 대한 고민들은 한가로운 일로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현실의 시스템이 거대한 벽처럼 여겨져서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 싶은 좌절감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대책 없이 커진 듯 하군요. 서둘러 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저는 현장을 방문하고 쓴 르포를 좋아합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이 책도 여러 국가와 도시를 방문하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덕분에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일들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또 그것이 내가 살고 일하고 있는 것들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소개하는 책과 서평이 독자들을 뭔가 새로운 배움과 고민으로 이끌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릴레이 서평의 다음 주자로 모시고 싶은 분은 기상청 소속의 국가기상위성센터에서 위성기획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원재광 박사님입니다. 기상위성과 기상관측 분야에서 10여 년간 일하고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을 다음 주자로 점찍은 것은 우선 개인적 궁금함 때문입니다. 오래 전 함께 책을 번역한 이후 가끔씩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요즘은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합니다. 그의 서평을 읽으면 도움이 되겠지요. 릴레이 서평 주자가 되어달라며 연락을 하니, 원재광 박사는 여기서 ‘달린’ 주자 중에서 공무원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듯합니다. 그러니 더 잘된 듯합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과학기술자들이 참여하면 이 코너가 더 다채롭고 풍부하게 되겠지요. 국가 공무원으로 살고 있는 과학기술자는 어떤 책을 소개해줄까 궁금합니다.

장경애 이정모 노승영 강양구 김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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