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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생관 (이달의 주자: 오철우) 천두슈 저

   제가 일하는 편집국 부서엔 정말 다양한 분야를 취재보도 하는 다양한 선후배 동료 기자 분들이 있습니다. 종교, 육아, 여행, 환경, 패션, 요리, 사진, 그리고 몸 수련까지, 갖가지 이야기를 전하는 분들과 함께하는 부서에서 저는 과학 분야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주 다른 자기 분야에서 다들 열정적으로 즐겁게 일하는 기자들이 한 부서에서 지내다 보니, 인생의 즐거움은 다 천차만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물음을 던져봅니다. 저마다 인생의 문제에서 과학은 어떤, 어느 정도의 자리를 차지할까? 과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지금 시대에, 과학은 행복한 인생의 요건인 건가, 아니면 인생을 논할 때에 과학은 별개일 뿐인가?
 이 책이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순전히 『과학과 인생관』이라는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책을 사서 펼쳐보니 사실 그런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을 곧바로 제공하는 그런 책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 시대에 한국 사회의 독자가 읽기에는 지극히 예스럽고, 현학적이고, 또한 결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꼬리를 무는 혼란스런 주장과 반박의 연속같기도 합니다. 하긴 책이 출판된 1920년대는 양자역학도 없었고, 우주선도 없었으며, 우주대폭발(빅뱅) 우주론도 없었고, 컴퓨터와 인공지능도 없으며, DNA도 모르고 뉴런을 다루는 신경과학도 없던 시대였으며, 게다가 중국 당대 지식인들의 논쟁이었으니 거기에서 오늘의 독자가 당장에 얻을 이해는 많지 않아 보입니다.

 이 책은 1923년 무렵 중국 사상계에서 ‘과학과 인생관 논전’이 벌어졌을 때 논쟁에 참여한 사상가, 철학자, 과학자 등 여러 분야 지식인들의 글을 모아 펴낸 책입니다. 중국 고대사상의 전통도 알아야 하며, 서양 지식·문화를 수용하던 중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문화의 파산을 목도하며 일어난 중국 지성계의 회의와 혼란, 그리고 격변하던 당대 중국의 정치적 상황도 알아야지, 논쟁의 복잡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사실 이런저런 이유로 당시 논쟁에 빠져들어 공감하며 읽기는 쉽지 않았습니다만, 20세기 초에 일찌감치 ‘과학과 인생관’이라는 근본 물음에 대해 중국 지성계가 불꽃 튀는 논쟁을 벌였다는 점은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1923년 베이징대학교의 장쥔마이 교수가 ‘인생관’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청년들에게 과학에 기초를 둔 인생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시작된 논쟁은, 서양 과학 신지식을 들여와 중국을 개혁하려던 지식인들과 과학기술 문명과 문화의 한계를 주장하는 지식인들이 부딪히면서 1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논쟁을 관통한 주제는 “인생관은 과학에 의해 지배될 수 있는가?”, “인생관은 과학에서 벗어난 다른 문제인가?”라는 물음에 있었습니다. 29편의 글에는 당대 과학으로 다뤄지는 물리학, 진화론, 생물학, 화학 지식이나 기술·기계 문명들, 그리고 인류 지식체계의 발전과 계통, 동양과 서양의 정신-물질문명, 더 나아가 이성과 감성의 철학적 논제들까지 다양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처음 논쟁을 점화한 장쥔마이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인생관의 특징은 주관적이고, 직각(直覺)적이며, 종합적이고, 자유의지적이며 단일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다섯 가지 특징 때문에 과학이 어떻게 발달하든지 간에 인생관의 문제는 결코 과학이 해결할 수 없으며 오로지 인류 자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이는 적어도 인생의 일부분은 과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절충적 주장을 제시했습니다.

“인생 문제의 대부분은 과학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일부분, 혹은 가장 중요한 부분은 초과학적이다.” “인생 문제에 있어서 이지와 관련된 것은 확실히 과학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나, 감성과 관련된 것은 확실히 초과학적이다.”(량치차오)

 과학자들과 유물론 철학자들은 이런 현학과 초과학을 비판하면서 과학적 세계관의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과학의 목적은 개인의 주관적인 편견 -인생관의 최대 장애물-을 없애는 것이며, 사람들이 공인할 수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딩원지앙)

 그래서 인생관의 변화는 과학 지식의 변화와 연관됩니다.

“인생관은 지식에 따라 변한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과 다윈의 인류 원숭이 기원설이 제기된 이후 인류의 인생관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만약 인생관이 직각적이고 원인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연계에 대한 지식이 변화함에 따라 달라지겠는가?”(탕위에)

 1920년대 ‘과학과 인생관의 논쟁’은 과학적 세계관이 우세한 국면으로 나아갔으며, 이 논쟁은 과학적 세계관을 중시하는 중국 문화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책의 서문을 쓴 실용주의 철학자(후스)가 내다보았듯이,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생관을 과학적 인생관으로 점차 바꾸어왔습니다. 과학 지식에 바탕을 두어 세계를 바라보는 과학적 세계관은 이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 물음들이 대걔 그렇듯이 ‘과학과 인생관’ 문제는 사실 너무나 넓고도 추상적인 주제입니다. 그렇기에 과학도 날로 변화하고, 사회도 날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런 물음의 추상성은 아마도 다시 다른 논점으로 구체화하여 제기될 만할 것입니다. 1920년대에 얻으려 했던 답변과 2017년에 얻으려 하는 답변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과학’과 ‘인생’이라는 두 낱말을 함께 묶어 생각하는 일은 흥미로워 보입니다. 후스가 1920년대에도 말했듯이 많은 이들이 논쟁 대상으로 삼은 “과학적 인생관”이라는 게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두고서도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대다수가 과학이 인생문제 혹은 인생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을 뿐이지 과학을 인생관에 적용시키면 어떤 인생관이 나오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후스)

 거의 100년 전에 이뤄진 두터운 논쟁의 흔적을 보다보면, 우리 시대에 과학은 대체 무엇인지, 과학과 사회는 무엇을 왜 소통하려는 것인지, 행복한 삶을 위해 과학의 유익함은 저마다의 인생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것인지와 같은, 분명한 한 가지 답을 얻기 힘들지만 중요한 물음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인생의 문제에서 과학을 바라보는 것은 이밖에도 여러 생각거리를 줄 듯합니다. 책을 더 파고들어 읽어보면 1920년대에 여러 중국 지성인들이 보여준 논쟁에서 그런 답의 흔적도 찾을 수 있을까요?
 

  다음 릴레이북의 필자로, 국내 의생명과학계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브릭(BRIC)’, 즉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에 계신 이강수 실장을 추천합니다. 과학 기자 생활을 하면서 생명과학계의 이슈를 볼 수 있는 브릭 게시판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다보니, 일찌감치 이 실장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구자사회 내의 소통, 과학과 사회 간의 소통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크신 분입니다. 한국에 연구자사회의 값진 소통마당으로서 브릭이 이어져온 데에는 여러 분들의 참여와 노고가 있었는데, 이강수 님은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분일 겁니다. 이강수 님은 학부에서 해양생물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과학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습니다. 1998년 이래 지금까지 브릭의 소통마당을 넓히며, 가꾸며 지키는 분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브릭은 과학문화재단의 대한민국 과학콘텐츠 대상(2004년), 환경재단의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2005년), 생화학분자생물학회의 올해의 생명과학보도상(2011년), 다음세대재단의 디지털유산 어워드 본상(2012년) 등을 받은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소중한 미디어이자 공론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실장은 “브릭에서 일하면서 연구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좋은 연구문화를 만들기 위한 과학기술 정책, 문화, 사회에도 관심을 갖고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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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술술 읽혀지는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 주자의 글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