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 평전 (이달의 주자: 이강수 ) 이병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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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비 박사로 잘 알려진 석주명 선생의 평전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6.25사변까지 어떻게 보면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과학자의 삶을 선택한 생물학자 석주명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석주명 선생을 다룬 많은 책 중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뽑히고 있어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릴레이북에 소개합니다.
평전의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하기 보다는 과학자의 삶을 산 석주명 선생의 이야기 이니 만큼 과학이 가진 5가지 특징(과학적 탐구와 기술의 윤리, 엄정식)과 비교해 그의 평전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자율적 태도]
과학자는 과학적 공동체 안에서 관습을 준수하고 규범을 지키며 일정한 패러다임을 수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방법론상의 장치들일 뿐이지 거기에 갇혀있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은 결국 극복되기 위해서 과도기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과학자에게 패러다임은 소중하지만 진리는 더욱 소중하다. 이러한 태도는 진리에 임하는 자신의 자율성의 발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종교적 진리는 종교인을 자유롭게 하지만 과학적 진리는 무지와 불편과 위험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이것은 과학적 탐구와 자율성이 가져다 준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과학적 탐구와 기술의 윤리, 엄정식).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업 전문학교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서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 입학한 석주명은 농림학과에 입학해 1년을 공부한 뒤 박물관(생물학과)과로 옮겨 학업을 계속 이어나갑니다. 졸업을 앞두고도 뚜렷한 길을 찾지 못했던 석주명은 은사 오카지마 긴지 교수로부터 나비연구에 대한 제안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는 조선인이 나비를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어려움인지 알고 있기에 선뜻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학자의 명예는 그 사람이 남긴 학문 업적에서 나오는 것이며, 학벌이나 직함이 문제가 아니요 중요한 것은 업적이다”라는 말과 함께 “자네는 조선인이 아닌가? 마땅히 남이 손대기 전에 자네 힘으로 조선 나비를 연구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십년만 정말 열심히 연구하다보면 자네는 틀림없이 조선 나비에 대해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네”라는 스승의 말에 나비연구를 결심하게 됩니다.
[합리적 방식]
탐구의 방법에서 볼 수 있듯이 계시나 초능력 등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감각적 지각과 이성 판단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과학은 합리적이다. 가설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그것은 개인의 직관과 상상력, 때로는 영감 같은 것에 의존할 수 있지만 거기에 머물고 있지 않고 반드시 경험적 증거와 합리적 논증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합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과학적 탐구와 기술의 윤리, 엄정식).
나비연구를 시작한 석주명은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초기에는 선행 연구 문헌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시작을 하다 보니 매우 막막하게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많은 수의 개체를 채집하고 관찰을 반복하면서 나름의 분류 체계를 만들어 갔으며, 그러한 연구들이 축적되면서 오히려 기존에 발표된 도감들의 분류 체계들에서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오류들은 석주명이 생각하기에 같은 종류의 개체를 많이 수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무지 때문이고, 그 무지는 바로 명명규약의 결함에서 왔다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같은 종이라도 형질이 조금만 다르면 서로 다른 개체로 취급해서 학계에 발표해 버리는 일명 엉터리 신종발견 행위들이 많이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신종을 발견해 자기의 성을 붙여 명명하는 일이 생물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명예였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이 발전된 지금도 이러한 사이비 과학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사이비 과학에 대한 매력은 시대를 떠나 과학자들에게 끝없이 다가오는 유혹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비판적 입장]
과학자의 세계에는 영원한 진리나 절대적 권위는 존재하지 않고 어떠한 이론도 항상 새롭게 검토된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이고 좀 더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면 과학적 탐구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은 다른 과학자의 이론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비판의 과정을 거쳐서만 새로운 형태의 포괄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과학적 탐구와 기술의 윤리, 엄정식).
석주명은 이런 사이비 과학으로 명성을 얻은 일본의 대표 곤충학자 마쓰무라의 연구결과 중 한국 나비의 동종이명 844개를 말소했습니다. 석주명의 이론(변이곡선 이론)은 당시 여러 학자들로부터 인정받았고, 그의 학구자세에 많은 일본학자들이 갈채를 보냈습니다. 엄청난 채집 량에 의존한 석주명식 분류학 연구는 개체의 변이 범위를 규명한 ‘변이곡선’ 이론을 만들게 된 주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통계 수치를 생물 분류학에 적용한 사례가 서양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시도된 방법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석주명의 접근방법이 얼마나 과학적인 접근방법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개방적 자세]
과학은 탐구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실수와 오류를 범하지만 그것이 검증되거나 반증되면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개방적이다. 과학적 진리가 다른 종류의 진리와 달리 끊임없이 개선되고 그 축적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학자는 항상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자기가 도달한 결론에 회의를 품으며 결국 어떠한 형태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개방적 자세의 전형을 보여준다(과학적 탐구와 기술의 윤리, 엄정식).
석주명은 광복 후 한국 산학회에 가입해 ‘국토 구명 학술 탐험’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하게 되지만, 이미 나비를 전공으로 삼은 1930년부터 우리나라의 산과 석주명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국토 구명 학술 조사를 통해 ‘오대산 태백산 학술조사’, ‘소백산맥 학술조사’,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 ‘차령산맥 학술조사’, ‘선갑도·덕적군도 학술조사’, ‘다도해 총해 학술조사’ 등에 참여하여 전국을 누비며 백두대간의 학술적 탐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개체변이 범위를 규명한 석주명은 분류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 했다고 보고, 1940년부터 분포 쪽으로 연구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변이를 다루는 논문에서 분포 지도를 덧붙이기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분포 연구는 한국 나비의 유연관계와 분포 상태의 계통을 세우는 일, 즉 지역을 통해 나비의 관계를 아는 것과 나비의 분포와 활약을 알아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비록 본인이 정한 분포 연구의 목적을 모두 달성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유연관계를 밝히고 계통을 세우기 위한 분포지도는 다행이 끝을 보았습니다.
[보편적 성격]
과학적 탐구의 성과는 어느 시대나 지역, 혹은 특정한 국가나 민족 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삼라만상에 골고루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또한 그것을 적용한 기술이 어느 특정한 부류의 개인이나 집단에만 귀속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보편성을 지닌다. 물론 과학자에게는 조국이나 자기 공동체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탈피하는 자세로 탐구에 임하는 것이 항상 과학자로서의 임무인 것이다(과학적 탐구와 기술의 윤리, 엄정식).
1939년 3월에는 본인의 10년 연구를 총 결산하고 그를 세계적인 학자로 끌어올린 ‘조선산 접류 총목록’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책은 한국산 나비를 연구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할 고전이요 교과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1940년에 비로소 출간된 ‘조선산 접류 총목록’은 세계 박물관에서도 구입이 이루어졌습니다. 석주명은 한국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된 전쟁 속에서도 연구실을 지켰습니다. 그는 죽기를 대비한 듯 언제나 연구결과를 적당한 곳에 마무리 지어 두었으며, 그가 남긴 엄청난 분량의 유고 중에서 미완성인 채로 남은 원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저서 17권, 논문 128편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과학자의 삶]
석주명이라는 과학자의 삶을 5가지 과학적 태도와 연관 지어 살펴보았습니다. 좀 억지스러운 측면도 있겠지만, 과학적 태도와 석주명의 삶이 많은 부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석주명 선생의 삶은 저에게 '과학자 다운' 과학자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모든 과학자는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에 맞는 제한된 연구 환경 속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 연구를 진행해 왔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노력들은 보이지 않는 실험실에서 계속 되고 있을 것입니다.
평전을 읽은 누군가는 어려운 시대 환경 속에서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낸 석주명 선생의 모습에 열광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계적 연구 성과, 세계적 석학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에 주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석주명 선생의 삶을 통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과학을 대하는 진정성, 실천성,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학자의 충실한 삶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역사 속 생물학자로 남은 석주명 선생의 삶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는 각자의 생각에 맡기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석주명 평전을 읽고 있는 연구자(혹은 연구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라면 자신에게 무수히 던져야 할 질문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답이 비슷할 필요도 없고,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이란 무엇일까?'
'과학을 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나에게 과학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책 내용을 이렇게 재해석 해주시니 느낌이 다르네요.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인데, 그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