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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이달의 주자 : 박혜진) 문유석 저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도시는 인구 8000의 작은 시골도시로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도 드문 도시입니다. 연구소에 막 도착했을 땐 제가 이 연구소의 유일한 한국인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소의 다른 부서로 한국인이 한 명 더 왔습니다. 한국인이 무려 2명이나 된 거죠. 그래서 연구소 동료들이 다른 한국 친구는 만나봤냐고 물어 보더라구요. 진즉에 만나서 통성명도 하고 밥도 같이 먹었던 터라 “마침 그 친구와 동갑이어서 친구(friend)가 되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분위가 조금 이상해지더라구요. 한 친구가 “나는 너랑 동갑이라서 다행이다.” 라고 농담을 하기 전까지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서양에서는 나이가 다르다고 해서 선배/후배같은 관계가 형성되는 게 아니므로 모두가 친구(friend)였던 것이죠. 저는 순간 너무 당황해서 한국에서는 두 사람의 나이가 다른 경우 더 어린사람은 상대의 이름을 호칭없이 부를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어린 사람은 상대방에게 “언니/누나(sister)” 혹은 “오빠/형(brother)” 같은 호칭을 붙여야 한다고 말이죠. 그랬더니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은 어린 사람한테 뭐라고 하냐고 묻더군요. 순간 또 당황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어린 사람에게 호칭을 붙이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었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번도 이런걸 생각해본 적 없었다니 사실 그게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제가 나고 자란 곳의 문화가 저의 생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개인의 삶과 생각은 문화와 분리시키기 어려워 보입니다. 제가 소개 드릴 책,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도 우리의 삶과 문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 그 중에서도 “눈치와 겉치레를 중요시하는 한국의 집단주의적 문화”에 대해서요. 짧은 에세이를 묶어 크게 3개의 장으로 편집한 이 책은 집단주의문화가 어떻게 개인을 불행하게 하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닌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사실 “개인주의”라는 말은 으레 “무관심”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책을 읽고 나면 ‘개인주의자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하실 겁니다. 누구나 다른 개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존중받기 위해서 말이죠. 세상에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만약 단 한가지의 특성 만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그래서 다른 모든 개인이 그 특성을 가지기 노력해야만한다면 그건 불행한 사회일것입니다. 그게 바로 집단주의문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죠. 때에 따라 요구사항은 여러가지 “해야한다”로 표현됩니다. 한 가지 답만이 허용되고, 그 모범답안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은 “인생의 패배자” 혹은 “루저”가 됩니다. 그래서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이 어느새 자신의 욕구가 됩니다. 마음속의 욕망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집니다. 물론 이런 욕망자체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책 본문에서도 얘기하듯 인간의 본능은 생각보다 잔인하기 때문에 문명화 과정을 거쳐 폭력적 약탈보다는 협력을 하도록 진화한 것이지요. 문제는 이런 욕망자체가 아니라 “그러 해야만 한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 직업적 성취만이 자신을 규정하는 전부가 되었을 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해 집니다. “자기계발서”와 “힐링”도서가 동시에 난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만이 정답인 사회. 보통의 삶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그래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다 모두가 지쳐버린 사회말입니다.

저자는 심리학자인 서은국 교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합니다. “행복 전략에 있어 큰 것 한 방보다 다양하고 자잘한 즐거움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 심리학의 연구 성과다.”, “직업은 직업일 뿐 자신의 전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취미활동, 봉사, 사회 참여 등 다양한 행복 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고 반드시 백댄서가 되어 평생 춤만 춰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일하면서 동호회 활동으로 주말에 홍대 앞에 나가 춤을 춰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재능과 욕망의 크기에 따라 합리적으로 선택하면 그 뿐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역량안에서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고 자신이 원하는 소소한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이죠. 30여년 전 독일로 이민해 일만했던 한국 친구가 퇴직 후 아무런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며 안타까워 하던 한 독일인의 얘기를 떠올리며 삶의 소소한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아직은 제게 뭐가 소소한 행복인지 몰라 일단 저녁엔 퇴근을 해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을 한국의 가족들이 생각났습니다. 또, 여전히 마음속에는 성공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에 따른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있었습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소소한 행복, 보통의 삶”을 받아 들일수 없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랜시간 체화 된 생각이 변화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죠. 생각해보면 사실 “보통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걸 극복해 낸 성공한 사람들 보다는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보통의 삶”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보통의 삶”에 대한 거부감이 오랜시간 저를 괴롭게 했던 주범이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에도 마냥 이 소소한 행복에 대한 욕구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욕구을 받아들인다는 건 보통의 삶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 때까지 마음속으로 인정해오지 않았던 다른 기준을 인정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여전히 성공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삶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저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저도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새롭게 갖게 된 보통의 삶과 소소한 행복에 대한 욕망이 기존의 욕망과 계속 대화를 나눠가는 수 밖에요. 여전히 직업적인 의미의 성공을 하고 싶다고 결론 내린다 하더라도 좋습니다. 아니면 적당한 직업을 가지고 제가 좋아하는 일을 소일거리 삼아 사는 삶도 좋습니다. 다만,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다른 쪽의 삶도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다짐해 봅니다.

  다음 릴레이 북 주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고온초전도체를 연구하시는 복진모 박사님입니다.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나타나는 (여전히 낮은 온도에서 입니다) 초전도체에 대한 작동원리와 그와 관련된 현상을 연구하고 계십니다. 학교 동아리 선배로서, 대학원 선배로서 평소에 좋은 조언을 많이 해 주셨는데요. 다독과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예리한 통찰력과 섬세한 감성을 동시에 탑재하신 분이십니다. 평소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니 만큼 많은 분들께 좋은 책을 추천해주실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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