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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 과학, 철학을 만나다. (이달의 주자: 최정모) 장하석 저

  이 책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과학철학을 가르치고 계신 장하석 교수님께서 쓰신 책으로, 2014년 EBS 특별기획으로 진행된 같은 제목의 강연 시리즈를 바탕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 책은 과학을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즉, 과학이 다른 학문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과학 지식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과학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질문을 던지고 있죠. 저도 과학 현장에서 직접 일하고 있는 연구자이지만, 이런 질문들에 자신 있게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이런 질문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과학철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부(1-6장)에서는 과학철학의 여러 견해들과 쟁점들을 소개합니다. 아무래도 쉬운 주제는 아니라 저자가 비전공자인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자 한 노력이 엿보입니다. 차머스의 『과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다른 과학철학 개론서들과 비교해 보자면, 이 책은 과학철학의 모든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다루려 하기보다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과학철학의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에 집중하여 그 난제들에 답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과 저자의 생각을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렇게 선별된 주제 중 한 가지 예가 저자의 다른 책인 『온도계의 철학』에서 깊이 다룬 “관측의 이론적재성”입니다. 우리는 흔히 과학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관측 사실이라고 배웁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관측 과정을 곰곰이 돌이켜 본다면, 무엇을 관측할지, 그 대상을 어떻게 관측할지, 그 관측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지 등에 여러 차원의 이론이 다시 개입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론은 관측에 의존하여 구성되지만, 관측 역시 이론에 의존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한 루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러한 과학철학적 질문을 소개하면서 질문이 나오게 된 맥락과 발생되는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소개합니다.

2부(7-10장)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과학사의 전문가이기도 한 저자가 여기서 과학사의 실제 사례를 여럿 소개하거든요. 7장과 8장에서는 18-19세기 화학을 예로 삼아 실제 과학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 지식이 현재의 수준까지 단선적으로 축적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이해 속에서 현재의 지식은 역사상 정답에 가장 가까운 지식으로 간주되고, 이전의 이론들은 틀렸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저자는 과학 지식의 발전 과정은 이러한 단순한 구도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채롭다는 것을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특히 화학을 전공한 저에게는, 라부아지에, 돌턴, 아보가드로 등 위대한 화학자들의 이론이 역사 속에서 “승리”한 것은 그저 정답에 더 근접했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9장과 10장은 과거의 과학 문헌들에서 찾은 신기한 현상들을 저자가 실험을 통해 재현하는 장입니다. 이 현상들은 지금은 과학자들이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현상들이지만, 과거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주제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볼 때 허황되어 보이는 보고도 있는데요, 저자는 그 보고도 막상 직접 실험을 해보면 매우 정확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한 예를 들자면, 물의 끓는점이 물을 담고 있는 그릇에 따라 달라진다는 보고가 있죠. 저자는 직접 이 실험을 검증해 보고, 현대 과학이 이를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을지 논의합니다. 이런 식으로 과거의 문헌 보고들을 실험을 통해 재현해내는 것은 최근 과학사학계에서도 로런스 프린치페(Lawrence M. Principe), 파멜라 스미스(Pamela H. Smith) 등의 학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참신한 방법론입니다. 연금술 실험처럼 우리 눈에 허황되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현대 과학의 언어로 검증한다는 접근법 자체도 흥미롭고, 이를 잘 가공하면 과학 및 과학사 교육에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교육 기자재들을 개발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3부(11-12장)에서 나오는 느낌입니다. 여기서는 과학지식을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특히 과학적 ‘창의성’은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룹니다. 창의성이 부족해서 늘 연구 현장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포일러 같지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다양한 실천체계가 공존하는 다원주의적 분위기가 과학적 창의성을 자극하고, 과학의 의미를 확장하며, 과학의 진보도 가속할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전망입니다. 여백이 부족하여 이 글에서는 다 설명할 수 없으니, 자세한 논지가 궁금하시다면 꼭 이 책을 구해서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과학자로서 매일같이 과학 활동을 수행하고 있지만, 막상 그 활동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기회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몇십 년간 이런 문제들을 고민해 온 과학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쉽게 떠먹여 주는 이런 책이 참 고마워집니다. (저는 전부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EBS의 강연 시리즈도 호평을 받은 모양입니다.) 물론, 다시 연구실에 나가면 관측의 이론적재성이니 진보적 정합주의니 하는 이야기들은 다 치워두고 제 연구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골몰하겠지만, 이렇게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책장을 넘기며 제 작업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네요.

  저는 다음 주자로 삼성전자에서 일하고 계신 박지영 박사님을 추천합니다. 박지영 박사님은 저와 같은 학과 출신으로, 학부 시절 같은 연구실에서 함께 학부 연구생 생활을 했습니다. 관심사도 비슷해서 함께 여러 분야에 걸쳐 스터디도 여러 번 했었죠.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친구인지라 어떤 훌륭한 책을 소개해 줄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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