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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순간 (이달의주자:하헌건) 톰 말름퀴스트 저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해병대(R.O.K. Marine Corps) 장교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하헌건입니다. 먼저 멋진 책 소개와 함께 릴레이 바통을 저에게 넘겨주신 김예슬양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막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저를 데리고 예쁜 동네 도서관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는 어린이 열람실에 가득한 책들을 보고 좋아하던 제 모습을 즐겨 이야기해 주십니다. 흐르는 제 시간 속에 책이라는 중요한 존재가 자리잡은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스웨덴의 시인이자 대중음악가인 톰 말름퀴스트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첫번째 소설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순간(IN EVERY MOMENT WE ARE STILL ALIVE)’입니다. 저자 ‘톰’은 결혼식을 앞두고 임신 33주차의 아내를 급성 백혈병으로 떠나보냅니다. 그리고 곧이어 아버지까지 암으로 떠나보냅니다. 이 책은 저자가 겪은 고통의 시간들을 세밀한 묘사의 문장과 감정을 꾹꾹 눌러 놓은 절제된 문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 ‘톰’은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남긴 선물, 딸 ’리비아’를 돌보며 ‘법적’ 아빠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솔직히(제 기준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기대한 것 보다 잘 읽히지 않는다는 후문도 많은 작품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다른 책들처럼 쉽게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지켰던 주변인들을 각색하여 죽음의 순간을 아름답게 미화하고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작가는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어조를 유지합니다. 대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순식간에 잃어야 했던 저자와 주변인들이 마주한 공포, 슬픔, 절망과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불편한 마찰들을 숨김없이 하나하나 세밀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피어난 진짜 사랑의 이야기를 여과 없이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작가의 세심한 표현과 감정들이 놀라운 몰입감을 만들어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마치 내가 저자와 함께 이 시간을 견뎌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의사가 머뭇거리다 입을 연다. 요즘은 좋은 백혈병 치료법이 많이 나와 있어요. …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낸다. 카린, 왜 그래? 내가 묻는다. 아기 이름. 그녀가 말한다. 리비아? …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을 든다. 리비아. 그래 , 리비아로 하자. 내가 대답한다.』
『간호사가 1호실 문을 열어준 후에야 손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쫙 편다. 카린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애를 써봐도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 카린이 단숨에 말한다.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 … 뉘그렌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말을 덧붙인다. 환자의 사망시간은 06시 31분.』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불규칙적으로 이동하며 전개됩니다. ‘톰’은 냉혹한 현실과 따스한 기억들 속에서 끊임없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아내 ‘카린’의 장례를 준비하며 마지막 키스를 하고 싶다는 그에게 병리사는 ‘카린’의 시신이 너무 부패해 키스를 남길 입술이 남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딸 ‘리비아’의 출생신고를 하려는 ‘톰’에게 시청 공무원은 그와 ‘카린’이 혼인신고가 되어있지 않아 그의 딸이 현재 법적 고아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힐 때면 ‘톰’의 가슴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아내 ’카린’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는 한 발 한 발, ‘카린’의 남편에서 ‘리비아’의 아빠가 되어갑니다.

『카린은 제게서 못된 것들을 전부 씻어내고 저를 책임질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카린 덕분에 저는 제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누구든 죽을 수 있지만 카린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죽었어야 해요. 지금 여기에 카린과 리비아가 살고 있어야 하는건데… 카린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었습니다. 』
『카롤린스카 병원이 그립다고 말하면 너는 이해할까? 나를 위로해준 조산사들과 신생아실 간호사들, 가족실에서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우고 내가 울 때 함께 울어준 친구들… 내가 네 몫까지 아이를 사랑한다는 걸 너는 알 테지만, 그래도 좋은 시절은 다 지나고 중요한 일들 밖에 남지 않았다는 기분이 든다. … 나는 네 가슴에 손을 얹고 슬프다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한다. … 리비아가 햇빛과 함께 깨어나 일어나 앉는다. 내 이름은 이제 아빠다.』


이별, 절망, 눈물은 대부분 절대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알지만 잊고 있던 일상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깊숙이 느낍니다. 언젠가 하려고 했지만 일상에 치여 꺼내지 못했던 한마디를 토해내 듯 되뇝니다.

’20년 4월 7일은 제가 이 서평의 첫 문장을 적은 날입니다. 이 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습니다. 페인트를 곱게 바른 듯 파아란 하늘과 연한 다홍빛으로 환하게 피어 있던 꽃은 살랑이는 바람과 함께 행복감을 극대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행복한 순간이 내 삶의 마지막 기억이라면 어떨까, 매일 보던 얼굴들, 지겹게 반복되던 일상이 한 순간에 멈춰버린다면 어떨까?... 아직은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며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을 맞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절망의 순간에서도 계속 살아가야 함을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이 책을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했던, 그리고 원치 않지만 언젠가는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할 우리 모두에게 선물합니다.

  다음 주자로 포항공대 철강대학원에서 금속 3D 프린팅을 연구중인 어두림군을 지목합니다. 평소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함께 읽고 서로 다른 견해들을 즐겨 나눕니다. 적절한 유머감각과 함께 깊은 통찰력을 가진 친구이기에 다음 주자로서 과연 어떤 책을 이야기해줄지 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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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연(ehif45) 2020-05-28

정성들여 쓴 글 잘 읽었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보며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라는 김광석씨의 노랫말이 머릿속에 맴도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