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 매들린 밀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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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사립대에 근무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워킹맘입니다. 어려서는 공부 잘 하는 아이로 사랑받았고 지금은 공대에 몇 없는 여교수라는 희귀종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존감이 높지 못해 괴로운 속내를 끌어안고 삶 중 많은 부분을 완벽주의자이자 일 중독자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소중한 반려자를 만나 두 아이를 얻고 키우면서, 여성이며 엄마라는 정체성이 내 직장 업무를 포함해 삶 전체에 생각 이상으로 큰 도전이자 성장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중년에 들어서 복잡한 하루하루 속에서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찾기 위한 씨름을 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 길에서 만난 ‘키르케’라는 소설은 ‘최초의 마녀’라는 문구로 시선을 끌었습니다. 저도 종종 마녀가 되거든요. 한때는 ‘superwoman’이라는 아이디를 쓸 정도로 초인적인 능력을 갖고 싶어했고, 달마다 찾아오는 월경 때면 정말로 심술궂고 정신 나간 마녀가 되어버릴 것도 같습니다. 아니, 그냥 제 일상 자체가 마녀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론 악에 받쳐서, 때론 세상을 비웃으면서, 때론 비밀스런 계략을 꾸미는 기분으로, 제 정신인지 아닌지 모른 채 하루를 꼴깍 숨 넘어갈 듯 넘기기도 하죠.
키르케는 특별하지만 못났습니다, 저처럼. 해의 신과 강의 신의 피를 물려받은 님프이지만 자매들과 달리 신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외모와 목소리를 가지고 신비로운 능력도 없었습니다. 키르케가 가진 건 잘난 부모와 사회의 규칙을 어기고 자기 호기심을 따라 행동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재주랄까요? 그걸 감싸주는 사람, 아니 신이 주변에 하나도 없어서 키르케는 벌을 받고, 유배당합니다. 키르케는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니까요.
키르케가 신들의 세계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중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어느 정도는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생각보다 더 노골적이라 읽는 중에 참으로 우울하기도 했습니다. 여성, 혹은 여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 말입니다. 정연하게 정리해서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요. 꽤나 복잡한 마음이 드는 내용이라서. 이 가상의 이야기에서 대놓고 말하는, 남성으로 대표되는 약탈자, 폭력과 이기의 주체들의 악행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만큼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렇지만 이걸,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단정짓지를 못하겠다는 게 생각이 정리가 안되는 이유입니다. (같은 관점에서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작가 : 미역의효능)’라는 웹툰의 초반부는 키르케의 중반부와 유사합니다. 관례와 상식에 기반한 기득권자의 폭력성과 그에 대응하는 약자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 웹툰 또한 추천하고 싶습니다.)
새삼스러운 분노에 휩쓸리며 중반부를 읽고 나면, 풀꽃 향기가 바람에 가득 실려 오는 것 같은 결말이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말 그대로 풀꽃이 가득한 섬에서, 키르케가 상상하는 미래가 그려지는 이 장면을 저는 클로드 드뷔시와 에릭 사티의 음악을 들으면서 읽었습니다. 그건 지금의 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더 이상 마녀나 superwoman이 될 필요가 없다고, 불끈 쥔 두 주먹의 힘을 풀어주는 이 장면에 드뷔시와 사티의 음악은 매우 잘 어울리더군요. 많은 영웅들이 질긴 갑옷과 강한 무기로 무장하고 하루하루를 싸워 이겨내다 어이 없이 스러질 때 키르케는 스스로 전투를 끝내고 평안히 자신을 가다듬었고, 이것이야말로 제가 따를만한 한 ‘언니’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릴레이 주자는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의 안승호 연구위원님입니다. 삶도 일도 진솔하게 임하고자 늘 노력하시는 분이지요. 저 같은 젊은 연구자에게 성장의 기회와 영감을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분명 좋은 책들을 아주 많이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그 중 하나만 잘 골라주시기를 부탁드려봅니다.
엄마와 여성 직장인 두 가지 역할 모두 쉽지 않은 일인데 키르케와 같은 길을 걷고 계시다고 공감이 됩니다. 게다가 제가 평생 일하는 금속재료분야를 하시니 더 친근감이 갑니다. 미국에 있는 딸도 재택근무하면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데 어떨지 조금이나마 짐작도 되구요.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p.s. 소개해 주신 덕분에 조성진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달빛을 들어봅니다. 정말 마음이 차분해지네요. 감사합니다.
글을 참 잘쓰시네요. 정성들여 쓰신게 느껴집니다.
드뷔시와 사티에서 갑자기 눈이 번쩍. 책을 안읽었지만 분위기가 그려집니다.
원래 소설은 잘 안읽은데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