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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과 욕설

  들어가기 전에 먼저, 최근 사망한 스티브 잡스를 추도하고 싶습니다. 이공계의 거두이자, 정통 이공계가 아닌 아웃사이더였으며, 무시무시한 권력의 칼을 쥐었으면서도 어딘가 늘 외로워 보이던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탠포드 졸업식에서 한 연설, “Stay hungry, stay foolish!”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역사에는 중요한 세 개의 사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성경에는 사과로 지칭하지 않았지만, 밀턴이 실락원에서 선악과를 사과라고 했다고 합니다.), 둘째는 윌리엄 텔이 화살로 맞춘 아들 머리 위의 사과, 셋째는 뉴턴의 떨어지는 사과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세 개의 사과 위에 애플사 로고가 추가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 신화가 된,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는 ‘Jobs’ Apple’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존댓말과 욕설입니다. 요즘 중고생들이 욕을 입에 달고 산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희들 때도 남학생들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다만 요즈음은 욕이 다양화되었을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잔뜩 부과된 삶이 어린 학생들을 욕 나오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은 어른들에게 존댓말을 해야 합니다. 바빠 죽겠는데, 존댓말을 하느라 시간이 더 걸리죠. 존댓말로 어른들을 공경하다 보니 쌓인 스트레스를 욕으로 푸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좋게 봐주면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싹수가 노란 애들도 물론 있겠죠. 성년이 될 때까지는 인간을 성선설의 잣대로, 성년 후에는 성악설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위에서 필자의 주장은 존댓말이 있기에 욕이 더 많아졌다는 논리입니다. 존댓말이 별로 발달하지 않은 서양 언어에서는 욕설이 몇 종류 안됩니다. 우리말에는 존댓말이 있다 보니, 다양한 어감이 존재하고 말에 상당히 많은 감성이 혼합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우리처럼 경어가 발달된 일본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욕을 하기보다는 아예 진심을 잘 드러내지 않는 쪽으로 언어생활이 진화한 것 같습니다. 다혈질인 우리 민족과 차분한 일본 사람들의 기질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요즘이야 그런 일이 드물겠지만, 70년대 재래시장에서는 흥정을 하다가 서로 싸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싸움구경은 늘 재미있는 것이었기에, 둘러싼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보면, 애시당초의 분쟁 원인은 없어지고, 다툼  와중에 상대가 사용한 무례한 ‘말투’ 때문에 다른 싸움으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왜 반말이야? 나이 몇 살 먹었어?”라는 식으로 불이 옮겨 붙는 것이죠.


  존댓말은 나이와 신분에 따른 계급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토론 시에는 이미 한쪽의 권위를 더 많이 인정하는 불평등을 묵인한 채 시작됩니다. 회의에서도 동일한 의견을 내거나 질문을 하기보다는, 지시를 받아적는 것으로 끝나죠.  한국에서 직장생활 할 때의 회의시간을 돌아보면, 상무님이 자리를 뜨면 다시 부장님이 바톤을 이어받던 경험이 많습니다. 상무님의 진의를 확인하고,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장님의 훈시가 있습니다. 다시 부장님이 자리를 뜨면 과장님이 좀 더 디테일한 스케일로 조정을 할 때부터는, 사원들의 자세가 좀 풀어지면서 입에서 욕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과장은 좀 만만한 상대이다 보니, 사원들이 스트레스를 분출하고 컨디션을 ‘리커버리’하는 과정입니다. 이럴 때 과장님은 항상 어머니처럼 사원들을 잘 다독거려주어야 하는데, 어머니 역할 대신 시어머니 행세를 하는 과장님은 ‘밥맛’이죠. 좋은 과장의 ‘어머니 리더쉽’은 욕을 긍정적인 분출로 만들지만, 반대의 경우 일할 맛이 더 떨어지게 만듭니다. 높은 분들과 가지는 회의의 특징은 질문이 극히 절제된다는 것이죠.  이런 수직구조는 존댓말의 존재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저를 상당히 어려워하는 후배가 있습니다. (‘선배-후배’라는 단어는 서양에 존재하지 않는, 수직구도의 대표주자입니다.) 이 친구가 가끔 이메일을 보내는데, 영어로 보내요. 그 후배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말로 쓰면 좀 더 다정할 것 같은데,  서론이 길어질 것 입니다. 글투도 예사 존댓말로 하기도 그렇고, 극존칭으로 쓰기에는 제가 아직 노인이 아니어서 꺼려지죠. 그러다 보니, 그냥 Dear Dr Jun, How are you in these days? 로 인사를 끝내고 Could I ask a favor to you? 처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이 글의 목적이, 사회에서 욕을 퇴출하려면 존댓말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존댓말 없는 서양어가 더 좋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부지불식 간에 우리가 처한 확연한 수직구도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잘 느끼고 감지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래 서열 사람들이 나에게 하기 어렵거나 거리를 두고 있는 부분들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 부분이 해소되지 않고는 참된 소통은 어렵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아직은 어려 보이는 우리 아래 세대들이 사실은 그렇게 가소로운 철부지가 아닌데, 다만 당신 앞에서는 그냥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하고는 말이 안통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이들과 좀 더 깊이 소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얻는 것이 아주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존댓말이 토론의 평등성을 해치지 않게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투’가 토론을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게 하려면 연구를 좀 해봐야합니다. 이 부분은 세월이 상당히 걸리겠죠? 하지만, 토론보다는 지시로 끝나는 회의를 천년만년 좌시할 수는 없잖아요? 아니라구요? 신세대들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서 탈이라구요? 너무 그쪽으로 가도 안되죠.


  ‘내가 혹시 살짝 자폐증을 가진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가 들고 있는 요즈음이다 보니, 사통팔달의 소통은 저 자신에게도 매우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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