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루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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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전기과에서 전자기학도 공부한 엔지니어입니다. 제가 근무했던 프린스턴 대학의 플라즈마 연구소는 물리학자들이 많은 곳이어서 외부인들이 저에게 물리를 전공했냐고 묻기도 하고, 우리 아이들은 아빠의 전공이 물리학 근처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오해를 굳이 해명하지 않습니다. ‘공학이나 과학이나 따분하기는 마찬가지야!’라는 생각도 있지만, 과학자가 공학자보다 낫지 않느냐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상당히 다른 길이기에 최근부터는 엔지니어로서의 정체성을 많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정체성 회복의 첫번째 과업으로, 누구를 멘토로 하면 좋을까라는 고민을 하며 몇 해를 보냈지만, 딱히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노벨상은 산사람에게만 수여한다는데, 저는 멘토를 타계하신 분들 중에서 고르기로 했습니다. 나이 50이 넘어 멘토를 모시려니 당연히 왕고참들은 벌써 유명을 달리하신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엔지니어라고 부르기가 좀 불편하고, 자동차왕 포드는 오히려 기업가라고 봐야 하기 때문에 부적절하고… 사실 없는 것은 아니고, 제록스 회사에서 처음으로 복사기를 만들었다는 칼슨 (Chester Carlson)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심령술에 빠졌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청빙을 취소했습니다. (저는 복사기의 발명을 컴퓨터나 휴대전화 발명 만큼 높게 생각합니다.) 사실 에펠탑을 설계한 에펠로 거의 결정하려고 했습니다. 에펠은 프랑스에서 제가 공부한 학교의 선배이기도 했는데, 다른 선배인 암페어가 섭섭해하지는 않을 지, 엉뚱한 고민도 해봤습니다.
그러다가 피아노 연주를 듣던 중에 무릎을 탁 치며 스승으로 모실만한 분을 찾았습니다. 폴란드계 미국인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입니다. 왜 썰렁하게 엔지니어가 음악가를 멘토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이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최근에 음악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작곡가-연주가의 관계가 마치 사이언티스트-엔지니어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곡가는 곡을 쓰고 연주자는 그 곡을 연주합니다. 마치 과학자가 이론을 만들고 기술자가 그 이론을 응용해 제품을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작곡가의 원래 의도와는 상당히 다르게, 새로운 해석으로 새 시대를 여는 연주자라야 대가입니다. 악보를 기계적으로 카피하는데 머물지 않고, 종이 속의 건조한 기호를 영혼이 담긴 소리로 구현해내는 일이 연주자들의 사명입니다. 누워있는 콩나물 대가리들이 마술피리에 이끌려 종이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는 과정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연주자들인 것입니다.
연주자를 작곡자의 하수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곡자는 자기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청중과 소통해 줄 연주자를 찾지 못한다면, 마치 갑 속에 갇힌 칼처럼 얼마나 답답할까요? 그러니 연주자는 작곡가의 하수인이기도 하지만, 작곡가를 세상과 묶어주는 매파이기도 합니다. 작곡은 이상이라면 연주는 현실입니다. 비슷하게 과학은 이상이고 공학은 현실입니다. 이상을 현실 속으로 불러들여 소통시키는 역할은 연주자들의 몫입니다. 마치 공학이 과학이론을 실세계의 유무형 제품으로 구현하고, 그 제품 사용자들과도 소통해야 하는 것과 상통합니다.
훌륭한 연주자는 주제 넘게 곡을 마음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작곡 의도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무대 위로 불려가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반면 작곡가는 좀 게을러도 됩니다. 마지막 결과물만 좋으면 과정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게으른 천재와 작곡가는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연주자는 늘 무대 위에서 찰나의 실수를 경계하고 손가락이 오그러드는 긴장감과 싸워야 합니다. 작곡가처럼 곡을 다시 고쳐 쓸 시간이 연주자들에게는 없습니다. 부지런하고 자기 관리를 잘 해야 좋은 연주자가 될 것입니다. 마치 과학자들이 쓰는 논문이나 이론은 시간이 걸려도 임펙트가 커야 하지만, 엔지니어들의 일은 늘 현장에서 안전과 제한된 일정-예산과 싸워야 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연주자-기술자는 작곡자- 과학자들이 덜 인식하는 현장이 중요합니다. 연주자들의 현장이 무대라면, 기술자들의 현장은 제품이 설계-생산되는 공장과, 제품이 고객을 만나는 시장(Market) 입니다. 공장과 시장은, 실수해도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엔지니어들의 살얼음판 무대입니다. 그러니 김연아나 손연재 만큼 부지런히 연습해야 합니다.
루빈스타인을 진짜 닮고 싶은 이유는, 95세의 장수한 인생을 살면서 90세까지 현역으로 연주자 생활을 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전투가 벌어지는 일선에 배치해 두었던 것이죠. (1982년 겨울,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제네바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1983년 1월에는 대졸신입사원 공채 면접에서 타계한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이 어느나라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가 받았었습니다. 이 글을 쓸만한 루빈스타인과의 인연이 옛날부터 있었나 봅니다.) 끝으로 과학자들에게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작곡자의 예로 제목에 올린 모차르트는 작곡자 뿐만 아니라 연주자로도 훌륭했다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훌륭하게 연주할 수 있었던 모차르트처럼, 과학자분들도 반쯤은 엔지니어가 되어야 제대로 된 과학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주제 넘은 조언을 드립니다.
루빈스타인을 멘토로 삼으신다니... 참신하신 생각인데요.^^ 에펠, 암페어와 학교 동문이신줄은 몰랐었어요.ㅎㅎ 과학자든 엔지니어든 전박사님처럼 이렇게 폭넓은 사고를 가져야 할텐데, 주변에 이런 분들은 많지 않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