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 프랑스의 동아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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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끝났을 때 우리나라는 아프리카 최빈국 수준의 경제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7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남한이 북한보다 못살았다고 합니다. 배급제인 공산체제와 시장경제는 구조가 다르기에, 당시에 북한과 남한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남북한을 경제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여태껏 잘해왔는데 앞으로가 걱정이라지만, 저는 한국경제가 계속 그런대로 잘 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상황을 안일하게만 보지 않고 늘 걱정하는 ‘촉’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기적적인 성공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좀 혼란스럽습니다. 자살률과 교통사고 사망률은 OECD 국가들 중 거의 수석에 가깝고, 출생률은 반대로 아주 낮습니다. 소득 불균형지수도 미국-영국을 제외하면 최고 수준입니다. 최근에는 청년실업률까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일자리는 없다고 아우성인데 3D 직종 일자리는 지원자가 없어서 외국인들을 데리고 온다고 합니다. 모두가 대학 가려고 하니 입시경쟁은 치열하고, 사교육비와 육아 부담이 두려워 애를 안 낳으려고 합니다. 불과 몇십 년 전에 둘만 낳아 잘 키우자며 산아제한 정책을 적극 추진하다가, 이제는 많이 낳는 부부가 애국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결혼을 부담스러워 해서 적령기가 거의 십 년이나 뒤로 밀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경제학자나 정치인들은 우리가 아직 충분히 잘살지 못해서 그런 것이고, 저 고지를 또 넘고 나면 이제는 태평성대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들을 자주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5천 불, 1만 불, 2만 불 고지를 다 넘어왔는데 또 넘어야 한다면, 그 고지는 끝도 없이 계속 넘어야 하는 산이 아닌가요? 물론 사람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진 탓도 큽니다. 어쨌든, 월급이 꽤 많은데도 오히려 더 가난하다고 느끼고, 이룬 것은 없는데 늘 바쁜 현실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좋은 인생이 아니라는 논지에는 동의하실 것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위 제목 이야기를 이제 하려고요. 정계를 은퇴하신 분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화두를 던졌었는데, 선거철도 한참 지난 지금까지 잔잔한 반향이 느껴집니다.
한국에는 등산모임도, 운동모임도 많다고 합니다. 돈이나 일만으로 행복해질 수 없기에 자연스럽게 생긴 건전한 현상입니다. 일본에는 저녁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모이는 스터디 모임이 많다는군요. 그래서 프랑스의 동아리 문화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현지에 상당히 오래 살지 않고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프랑스 학교에는 운동장이 없습니다. 쉬는 시간에 겨우 작은 마당을 거닐면서 햇볕을 쬘 수 있는 정도입니다. 운동장이나 체육시설은 지자체가 소유하고 운영합니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은 수요일에 수업이 적거나 아예 없어서 수요일과 주말에 학교 밖에서 체육과 음악-미술 과외를 각자가 알아서 받습니다. 저소득층에게도 기회가 갈 정도로 비용은 아주 저렴합니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예술학교들도 과외를 받습니다. 그런 학교 내에는 전공자와 비전공자, 어른과 아이들이 막 섞여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식 교과과정에 음악과 미술이 없습니다. 체육은 고등학교 졸업 시에 우리네 체력장 같은 시험을 보는데, 기초체력이 아니라 운동 종목으로 시험을 봅니다. 수영이나 구기 종목, 역도 같은 것을 선택해서 하더군요. 프랑스 바칼로레아는 고득점보다 통과가 중요한 시험인데, 공부를 평균 이상만 하는 학생이면 체육점수 없이도 바칼로레아가 통과됩니다. 그러니 예술이나 체육을 재미로 하라는 취지인 것 같습니다.
학교는 그렇고, 중요한 부분은 어른들의 동아리 활동입니다. 여기 어른들은 우리가 대학 다닐 때 하던 동아리 활동을 합니다. 구색이나 품새가 영락없는 우리나라 대학동아리입니다. 구성원들이 대학생에서 노인까지인데, 신입동아리 회원을 신학기에 모집합니다. 제가 사는 도시에서는, 9월 초 주말에 시내 한복판 도로를 다 막고 자기네 동아리 선전과 신입 회원 모집을 합니다. 분위기도 우리나라 대학 입학 초에 교내에서 벌어지는 동아리 모집과 유사합니다. 해마다 둘러보는데, 거의 백 개가 넘는 동아리들이 좌판을 벌이며 제일 많은 것은 춤 동아리입니다. 이날은 이 춤 동아리 회원들의 굿판같이 요란한 잔치로 ‘그들만의 리그’를 벌입니다. 외국어 배우는 동아리, 여행 동아리, 탐사 동아리, 운동 동아리에 심지어 바둑, 수지침, 붓글씨 동호회도 있습니다. 연회비가 1, 2백 유로 정도 됩니다만, 지방정부가 보조금을 준다고 합니다. 동호회들이 ‘1901년 동호회 법’이라는 법률에 따라 등록을 하고, 법인계좌를 개설하고 정부보조금을 받고, 자체 회계감사를 시행합니다. 이 동아리들이 커진 것이 프랑스 축구협회나 테니스 협회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오픈 테니스 대회를 주최하는 테니스 협회 같은 경우는 들고나는 돈의 규모가 엄청날 것입니다. 등록된 모든 동아리는 회칙을 경시청에 제출해야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회칙에 반드시 해체방법에 관한 규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회원 2/3가 동의하면 해체하고, 남은 재정은 어디에 기부한다는 등의 ‘유서’를 미리 작성해두는 것입니다.
게으르다고 우리가 손가락질하는 유럽을 점점 닮아가서, 우리도 저녁에 또 다른 삶을 사는 세상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노는 방법도 연구해야 할 때입니다. 한가하고 팔자 좋은 소리라고요? 팔자도 본인이 만들어가는 것이니, 빡빡한 분위기에 괜히 휩쓸릴 필요 없습니다. 잘 놀면서 돈도 잘 버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참에 멘토도 한 번 바꾸어보시죠? 일 똑 부러지게 잘하는 선배에서, 분위기 잘 맞추고 소통 잘되는 선배로 말입니다. 후자 멘토가 더 오래가는 지속가능형 인생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여기 칼럼에 써왔던 내용을 다듬고 추가해서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공학한림원에서 후원도 해주셨습니다. ‘엔지니어의 생각하는 즐거움’이라는 제목입니다. 많이 알려주시고 후원해주시기 바랍니다.)
백번 동감합니다 삶의 질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