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사회, 가벼운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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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계에서 뜨는 분야가 나노를 거쳐 생명-제약분야로 가다가 이제 급히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느낌입니다. 나노분야는 투입한 세월과 연구비에 비해 실적이 초라한 분야입니다. 지면으로 이렇게 심한 말을 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거의 사기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발전되는 분야와 융합하여 뒤늦게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생명과학 분야는 법적인 제약이 많아서 냄비근성으로는 답이 없는 분야입니다. 그러니 생명과학분야의 인재들은 연구를 하느니 차라리 의사나 약사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남아있는 연구자들은 장기간 기업이나 정부로부터의 지원이 쉽지 않아, 논문이나 내면서 학회에서 눈 맞는 외국기업에 기술을 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최근에 알파고 사건을 겪었고 비서나 친구 역할을 하는 듯한 일본 로봇들의 보도가 많아지면서 인간의 두뇌에 외모까지 예쁜 로봇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로봇은 주로 인간과 경쟁할 모션에 많이 집중했습니다. 예를 들면 불규칙적인 계단을 오르는 능력이 로봇의 가장 큰 평가지표였습니다. 이런 분야는 하드웨어가 비싸고 컨트롤도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한 번 실패하면 너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완전 망하는 것입니다. 계단을 오르다가 실패하여 벌렁 나자빠진 로봇을 본 기억이 있으시죠? 그 비싼 기계가 금방 고철덩어리로 변한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여비서 로봇은 그렇지 않습니다. 답변을 좀 실수하거나, 동작이 약간 어색해도 그렇게 극적인 실패라는 느낌을 안주니까요. 흔한 드라마 대사처럼 ‘예쁘면 다 용서가 되는 법’이지요.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보다 훨씬 쌉니다. 특히 여러 개로 복제할 경우 소프트웨어는 ‘카피-&-패이스트’만 하면 되니, 대량생산 모드라면 하드웨어보다 가격경쟁에서 한참 앞섭니다. 그러므로 계단을 오르고 벽에 도끼질을 하는 ‘남성 로봇’보다 나긋나긋한 대화가 가능한 ‘여성로봇’이 개발자에게나 구매자에게나 훨씬 매력적입니다. 어쩌다가 인간세상은 고사하고 로봇세상마저 페미니즘에게 점령을 당할 지경입니다. 사실 페미니즘이 판을 친다는 것은 길조입니다. 전쟁이나 재난 등 평화가 깨지는 상황이 닥치면 근력이 센 남성 중심으로 권력이 급속히 이동하니까요.
인공지능 분야에서 가장 인기있는 분야는 바둑이 아니라 언어입니다. 바벨탑 이전으로 인류를 되돌리려는 거대 프로젝트입니다. 자동번역 기능은 물론이고 문학작품까지 로봇이 만들어내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집필한 소설이 어떤 문학상 심사에서 예선을 통과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예선 턱걸이지만, 나중에는 당선소감과 함께 모니터가 작가얼굴 사진으로 나오는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한술 더 떠서 문학 좌담회 참석자 한 명으로 모니터가 턱 하니 놓이는 것은 아닐까요? 주제는 “ 미래 한국문학 어디로 가나?” 목소리는 작고하신 유명 작가들 중 한 분의 음성을 모방하여 구수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입니다. 이 분야는 사실 좀 쉬울 것 같습니다. 알파고가 예전 기보를 참조해서 바둑의 패턴을 인식한 것처럼, 빅데이터 처리 컴퓨터로 온갖 소설들을 다 집어넣은 후에 짜집기하는 것은 식은 죽먹기죠. 아마도 표절을 검토하고 피해가는 모듈도 집어넣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가 오면 드라마 작가들부터 퇴출될 것인 지, 아니면 인공지능으로 재무장하여 그들만의 세계로 들어오는 진입장벽을 더 높일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세상은 다 ‘오락사회’입니다. 있으면 재미있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입니다. 하지만 진짜 우리네 삶을 돌아보면,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많습니다. 당장 남북관계와 핵미사일 같은 문제는 변수에서 상수로 고착되어, 최고수준의 위험인데도 모두가 무덤덤해지는 권태기를 맞고 있습니다. 모두를 먹여살린다던 조선업은 불황이라고 난리입니다. 왜 크루즈 같이 고급배를 만들 생각은 진작에 안한 것인지요? 그리고 언제 닥칠 지 모르는 고강도 지진에 대한 대비는 하고 있는지요? 현재의 과학은 너무 가볍습니다. 제품만 경량화하면 될 일이지, 생각마저 가볍게 할 일은 아님에도 점점 가벼운 과학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경제라고 해도, 경제의 샘물은 과학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과학기술계는 너무 자신들은 하층부로, 패배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재미도 없는데, 권력도 없고 대중의 관심도 없는 분야라는 자조감이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투표로 결정되는 자유민주주의를 외부로부터 지키는 것은, 인기가 아니고 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의 힘은 보병이 아니라, 과학기술력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알파고라는 컴퓨터 하나의 침공에 온국민이 항복해야 했던 사건을, 구한말의 치욕처럼 느낄만한 책임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항상 큰 틀을, 본질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키는 사람들이니까요.
"생각마저 가벼워지는 과학"이라는 말씀에 저 밑에서 뭐가 꿈틀꿈틀 하네요. 공학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써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한 때 인가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