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모습처럼 사회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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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필자에게 한국에서 살아온 햇수와 외국에서 살고 있는 햇수가 비슷해지고 있다. 외국에서 30년을 살면서도 어릴 때 교육받지 않았으니 외국어 발음이 충분하게 현지화되지 않았다. 발음에 액센트가 심한 것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처럼, 그러니까 “ 이렇게 살다 죽게 내버려둬!”라고 여태껏 생각했었지만, 요즈음 생각이 좀 바뀌었다. 아마도 유튜브 탓일 터인데, 나중에 필자도 그 대열에 슬쩍 숫가락을 얹고 싶어서 뒤늦게 스스로를 닦달하며 발음공부중이다.
언어습득과정은 도자기 만드는 공정과 유사해보인다. 아주 이른 나이에는 반죽을 주물러 형태를 바꾸고 회전판 위에 올려 가지런한 모습이 만들어지는 진흙처럼 형태변환이 자유롭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불가마에서 나온 도자기처럼, 깨질지언정 형태는 못바꾸는 고집쟁이로 변신한다. 겨우 도자기 바깥에 그림을 그린 후 재벌구이로 만회를 노려볼 뿐이다.
진흙반죽부터 만들어진 모국어는 나중에 불가마에 들어간 외국어와는 전혀 다르게 어떤 경우에도 잊혀지지 않는다. 모국어는 생각을 구성하는 코드나 레고블럭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한국어로 생각한다. 모국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초등학교 교육에 가장 많이 기인한다. 지적이고 문학적인 양념이 빠진, 순수소통을 위한 언어는 초등학교에서 완벽하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언어의 문법과 어휘뿐 아니라 언어로 소통하는 방식도 사실 초등학교에서 형성된다. 예를 들면, 어떤 질문을 하면 선생님이 싫어하는지도 알게 되고, 수업중에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질문과 친구들과 개인적으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야기를 바꾸어 어른들 세계로 가보자. 소위 선진국이라는 국가의 어른들은 안정된 사회에 살게 되어 편안한 탓인지, 너무 모르는 정보가 많다. 바로 자기집 앞 도로 이름을 아는 사람도 흔치 않고 자신과 약간만 거리가 있는 일에는 정말 무관심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지적 수준도 워낙 표준편차가 커서 평균값이 가지는 의미가 적다. 그런데 어떻게 사회가 굴러갈까? 한동안 의문이었다. 이 큰 주제를 짧은 글에서 전부 다룰 수는 없지만, 굳이 몇 가지를 말한다면, 대체로 우리보다 더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고, 서로간에 소통방식이 더 많이 열려있다는 것을 꼽고싶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두 초등학교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지극히 단순화한다면, 선진국이라는 서구에서는 (주로 필자가 경험한 미국과 프랑스 이야기에 국한될 지 모른다.) 초등학교-중학교에서는 협력을 배우고, 고등학교-대학교는 자신의 재능과 적성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졸업하여 사회에 나와서 비로소 경쟁을 배우는 형태다. 물론 이 방식은 일단 모두에게 먹을 거리(일자리와 사회보장)가 어느 정도 보장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 방식을 조금씩 미리 도입하지 못하면 먹을 거리가 충분하게 만들어진 다음에도 사회는 지나친 스트레스와 피로감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공동체가 될 것이다.
필자가 사는 지역에는 한국에서 파견나온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고민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자녀들의 소질이나 적성 개발보다는 입시 경쟁에서 낙오될까봐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주로 보았다. 그리고 그 경쟁은 초등학교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이것은 계속 낮아지는 출생률과도 직결된다. 한쪽에서는 학벌이 더이상 중요하지 않고, 취업은 블라인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하는데, 학부모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 것일까? 최근에 한인교회 도서관에서 제법 많은 한글 저작들과 번역서들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익숙했었지만, 이제는 좀 낯설어보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글 저서들 안쪽 첫페이지에는 그 내용을 막론하고 (신앙 간증서에까지!) 저자의 학력이 자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반면 번역서 속의 외국 원저자들 학력은 기록이 아예 없었다. 재미있게도 외국 원저자의 학력은 없지만, 한글 번역자인 학국인들의 학력은 꼼꼼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출판사가 넣으라고 권하니까 필자 역시 출판한 책에 학력을 뺄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는 학력이 책의 품질보증서로써 중요하게 역할한다.
이런 문제를 단기간에 극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문화적 DNA를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학창시절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을 오히려 역차별하는 문제도 발생할 것이다. 여하간에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을 가르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불안한 마음을 잘 다스리고 아이들을 믿어주는 용기 있는 부모와 선생님들이 필요하다. 결론을 말해보면, 필자는 회의때마다, 말단서열인 사원들이 아무런 스스럼 없이 손을 들고 (종종 개념 없기도 한)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항상 좋은 질문이라고 치켜세운 후 상세히 답변하는 책임자들을 보는 것이 너무 부럽다. 그들은 우리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자유롭게 질문하고 성실하게 답변해야 하는 문화에서 살고있는, 우리보다 좀 더 자유로운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