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사회인가?
- 1161
- 9
- 0
나는 한국을 떠난 후 30년 동안 프랑스와 미국에 살면서 겨우 10년에 한 번 정도 한국을 방문해보았다. 하지만 그동안 해외에서 재외과학기술자협회 활동과 한인회 일을 하거나 한인교회를 다니며 꾸준하게 한인 커뮤니티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30년 동안 줄곧 한국사회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생각과 본질은 그대로일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지내왔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30년동안 외국에서의 한국 인지도는 수직상승했다는 사실이다. 옛날에는 “I come from South Korea.”라고 말하는 것이 창피했다. 일단 South라는 단어를 넣지 않으면 상대방이 “North or South?”라고 묻기 때문이다. 서방에서는 대체로 북쪽이 “우리 편”이기 때문에 North를 먼저 말하는 그들의 언어습관도 불편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우리 편”이었고, 서유럽에서도 북유럽이 남유럽보다 잘산다.) 그리고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한국을 이들이 얼마나 알까 하는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에서나 유럽에서나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약간 가리고 싶은 충동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불편한 지표들이 있다. 그것은 최고의 자살률과 교통사고 사망률 그리고 산업재해 사망률 같은 통계수치다. 다행스럽게도 5천명이 넘던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계속 줄어서 지금은 3천명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확연하게 좋아진 현상이라고 생각될 무렵, 이제는 출생률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뉴스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수치도 점점 내려가고 있다. 80년대에는 연간 출생자 숫자가 80만명을 넘었지만, 최근에는 25만 아래로 떨어졌다. 반토막도 아니고 1/3 토막이 난 것이다. 뭐가 신이 났는지 언론들은 앞을 다퉈 ‘국가소멸론’을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다. 나는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가 과도한 인구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구가 줄어드는 것 자체를 염려하지 않는다. 너무 적어지면 경쟁도 줄어들 것이고, 인력이 필요한 정부나 기업들은 실효성 있는 방안들을 내어놓을 것이고 국민들도 호응하여 다시 반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현재다. 편리하고 살기 좋은 나라임을 내외국인들이 공히 인정하는 사회에서 출생률이 이렇게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현재 다수가 행복하지 않으며, 현재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마저도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한다는 증거다. 그런데 내가 주변에서 만났던 수많은 한국인들은 대다수가 외국생활이 너무 불편하다며, 한국생활을 그리워했다.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만났던 한국인들은 중산층도 아닌 거의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전형적인 샘플링의 오류였던 것이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해결책을 내어놓으려면 문제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정부는 문제를 정확하게 알까? 아마 수치로는 알 것이다. 하지만 5년짜리 정부가 50년짜리 계획에 관심이 많을 리는 없다. 궁극적 문제는 주택문제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은 여성평등사회의 기치아래 젊은 여성들도 노동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결혼 후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지면서 경제활동까지 해야 하는 여성들이 “원더우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참여문제는 다음 기회에 논하고 오늘은 주택문제만 이야기해보자. 나는 사실 역대 한국정부가 주택문제 해결에 진심이었는지 의심한다. 고위관료들과 국회의원들 중 자기 집이 없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투기꾼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어떤 국회의원의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시작하던 연설에 잠시 매료된 적이 있지만, 그분은 강남지역구에 살기 위해 강북에 있는 집을 임대하고 자신은 강남에서 임차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맥이 풀렸던 적이 있다. 가장 교묘한 거짓말은 반쪽짜리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다른 반쪽에 대해 묻지 않고 쉽게 전체를 믿기 때문에 훨씬 속이기 쉬워진다. 그나마 “국회의원이 임차를 해본 것 자체가 신기하다!” 라고 생각한 국민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정말 신기한 것은 내가 외국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외국에서의 늦어터진 배송에 화를 내면서 한국은 당일에도 배송이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런데 누구도 그 일을 하는 배달원의 입장을 생각해본 것 같은 사람은 없었다. 만약 내 자신이나 내 자식들이 당일배송을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한국사회가 편리한 사회라고 옹호할 수 있을까? 왜 이리도 지속가능한 사회 시스템에 관심이 없을까? 그 무관심의 대가로 돌아오는 것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출생률이다. 주택문제는 한국에서 반세기 이상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지만, 그 어느 정부도 주택부나 주택청이라는 독립부서를 두지 않고, 건설교통부나 국토교통부 산하에 두었다. 건설교통부나 국토교통부라는 명칭은 국가의 입장에서 주택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반면 주택부라는 이름은 국민들 입장에서 주택을 바라보는 입장이다. 즉, 균형 있게 국토를 잘 관리한다는 대의가 아니라, 서민들에게 집을 마련해주려고 눈높이를 낮춘 소박한 이름이 주택부다. 이름이 어떠하든 정부와 의회 구성원들에게 이런 마음이 없이는 주택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전세제도로 집세 없이 사는 것이 훌륭한 한국적 주택문제 해결법이라고 굳게 믿었던 서민들은 이제 뒤통수를 맞았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한국 주택문제의 고질병은 전세라고 생각해왔다. 전세가 제공하는 달콤한 맛도 있기에 쉽게 버리기도 어려운 제도다. 궁극적으로 전세는 갭투자를 쉽게 만들어 주택시장을 투기판으로 만든다. 그리고 전재산을 집주인에게 맡겨둔 서민들은 인질처럼 집주인에게 묶여있게 된다. 구체적인 정책들은 담당자들이 필자보다 열 배는 더 많이 알 것이지만,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정치하려는 사람들이 이 봄 총선에서 승리하길 바란다. 그래서 2024년이 ‘K-Pop의 나라’에서 ‘살기 좋은 나라’로 성숙되는 원년이 되길 바란다. 이런 덕담이 정말 이뤄질 수 있을까? 여태껏 한국 근현대사가 그러했든, “서울의 봄”을 만든 6.29 혁명처럼 그날도 갑자기 올 것이며, 와야 한다.
(코센이 문을 닫거나 활동을 줄이면 필자가 계속 여기에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악의 경우라도 이번 호를 지나 작별인사를 할 지면은 있을 것으로 믿는다. 새해에도 세계곳곳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 건승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