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의 KOSEN 지기 - 김남득 박사
2002-07-08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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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3호가 달을 향해 발사되던 그날 밤에 저는 지구로 왔습니다."
코센의 광장카페 우정지기 김남득 박사(32)의 첫 마디. 우연치고는 정말 절묘한 우연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선지 '그가 공학자가 되고, 한국 과학기술정보의 요람인 코센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 필연을 예고한 우연 아니었을까' 로 비약해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미국 시간으로 1970년 4월 11일 밤(한국시간 4월12일). 김 박사가 안착한 곳의 문패는 문경새재와 주흘산으로 유명한 대한민국 경상북도 문경시. 요즘은 태조 왕건 촬영장 때문에 뜨고 있다는 곳인데 그가 자란 곳은 거기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두메 산골 마을이다. 버스가 하루에 한번 들어오고, 일곱 살 때에야 전기가 들어온 첩첩산중이라나. 지금도 부모님께선 거기서 사신단다.
자신의 탄생을 아폴로 13호가 함께 했듯, 그는 코센의 시작부터 함께 했다. 코센이 처음 생길 때 그는 아이오와 주립대 박사과정 3년 차였다. 대학 한인학생회 회장이던 그가 코센 배너를 학생회 홈페이지에 띄우면서 질긴 인연의 끈이 맺어졌다. "처음 방문했을 때의 실망은 말로 할 수 없었어요. 완전히 관리자 중심이었거든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을 받았죠" 국가적인 홈페이지가 사용자 환경이나 내용 분류, 구성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불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속에 있는 생각들을 모두 적었죠. 무시하거나 삭제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답을 받았고 실제로 그렇게 하더라구요." 코센이 회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에 의해 운영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는게 그의 얘기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주인이라는 의식이 생기면서 정이 들었다는 애정 고백인 셈이다. 특히, 정보 제공 대가로 유학생으로는 단비와 같았던 코센 장학금을 받으면서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했다는 솔직한 고백은 정겹기까지 하다. "그 장학금 중 일부는 부모님께 용돈으로 드렸다"는 언질에는 눈이 번쩍 뜨인다.
그는 지금도 가장 활동이 눈부신 회원으로 손가락 안에 꼽힌다. 최근 코센의 '좋은의견상'에서는 아이젠반님과 함께 최고상을 받았고, 개편된 홈페이지 버그 찾기에서도 득점 랭킹 1위를 고수하고 있다. "1등은 떼 논 당상" 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코센측은 "김남득 박사가 전공을 살려 디지털 워터 마킹과 관계된 포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 카페를 운영중이며, 광장 카페의 화기애애한 분위기 조성에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고 귀띔한다. 그 역시 전문 카페에 대한 홍보부터 한다. "제 전공 분야인 디지털 워터 마킹과 화상처리 분야에서 일하시는 해외 및 국내 전문가들간의 교류의 장을 만들고, 기술 동향을 나눕니다. 관련 분야에 관한 학회·논문 등의 자료를 제공하며, 새롭게 이 분야에 뛰어드는 분들을 위한 길잡이의 역할도 하는 다목적 전문분야 카페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 코센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더 크다" 면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산다" 고 겸손함도 잊지 않는다. 다만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나 모임에서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으면 스스로 못 견뎌하는 성격" 이라면서 분위기 메이커임은 부인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과학자로서 과학만큼이나 사람 사는 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한다고 한다.
코센의 장점을 묻자 "각 분야 전문가들의 손때가 묻은 분석물과 해외 기술 동향 등 과학 정보를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전 세계에 퍼져 사는 한국인 과학자들과 온라인 상에서 사심 없이 교류할 수 있다는 점" 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다. 애정 어린 고언도 빠질 리 없다. "더 많은 회원 확보와 전문인력(staff) 확충, 전문가들의 활동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영역 개발 등이 필요하다" 고 그는 지적한다.
코센 활동을 통해 공인된 그의 열성은 한일 월드컵 때는 애국심이라는 또 다른 용암으로 분출됐다. 그는 이 기간동안 코센 광장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보듯 '포틀랜드의 붉은 악마'로 스스로 변신했다. " '국운융성'이라는 네 글자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목이 터져라 태극전사들을 응원하면서 그간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과 터키간의 3,4위전을 보기 위해 새벽 3시에 40분간 차를 몰고 위성TV가 있는 아는 사람 집에 가 신세 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미국에 있는 우리도 붉은 색 옷을 입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가슴이 벅차 올랐죠. 우리 민족의 '한'을 풀어준 태극전사들과 붉은 악마 응원단의 활약,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시청 앞 광장에 있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아실런지요...정말 가고 싶었는데..."
제2의 고향인 미국에 정착하기까지 무척 힘들었다는 그다.그에겐 첫 해외 출국 경험이 바로 미국 유학 길이었다. 산과 계곡이 없이 그저 광활한 평야 뿐인 중서부 지방. 공항에서 학교가 있는 도시로 가는 차 안에서 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하늘이 그렇게 넓은 곳은 처음 봤습니다" 사방이 지평선 뿐인 풍경은 숨을 막히게 할 정도로 그를 조여왔다.자장면이나 함흥냉면이 간절히 먹고 싶어도 참을 수 밖에 없었고 보고 싶은 가족들을 볼 수 없는 고통도 컸다고 한다. 스물 세 살 때 시작해 7년간 계속된 유학생활 중, 96년 학위를 밟는 동안에 지금의 아내를 만난 건 드문 행복 가운데 하나였다. 아내와의 사이에 둔 두 아이, 현래(5)와 원래(2)의 이름을 짓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국에 계신 아버님이 애들 이름을 지어 보내셨는데 '래'자 돌림이라서 결정하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한때 클론 멤버였던 가수 강원래씨 덕분에 원래는 덕을 봤지만, 현래란 이름은 한국인이나 미국인에게 모두 어려웠거든요." 더구나 자신의 이름도 '지방시(촌스럽다는 뜻)'해서 더욱 그랬다며 그는 고이 간직해 온 자그마한 콤플렉스를 들추어 보인다.
한국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그는 유학 시절에 또 한 차례 변화를 꾀했다. 아이오와 대학에서의 석·박사 과정을 모두 전자공학(신호, 화상처리 분야)으로 마친 것이다. 박사 학위를 딴 후 디지마크(Digimarc Crop)사에서 디지털 워터 마킹 연구원(R&D engineer)으로 일하게 되면서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순위인 서북부의 포틀랜드 근교로 이사와 살고 있다. 디지털 워터 마킹 기술은 디지털 컨텐츠, 즉 디지털 오디오, 이미지, 비디오 등에 보통 기술로는 인식되지 않는 숨은 정보를 삽입하고 검출하는 첨단 기술.삽입된 워터 마크를 통해 저작권 정보 등을 확인하는 것인데, 요즘에는 아주 미세한 변형만 있어도 워터마크가 사라지게 하는 Fragile Watermarking 이 응용기술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워터마크가 방어적 기술인데 반해 스테가노그라피(steganography)는 비밀 메시지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공격적 수단의 데이터 하이딩 기술로 분류된다.김 박사는 "디지마크사에서는 개발된 워터 마킹 알고리듬을 향상시키거나 새로운 워터 마킹 기술을 연구한다"고 자신의 역할을 소개했다.
요즘 그는 한국 학생들 사이에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해졌다는 소식에 걱정이 크다. 인문과학도 아니고 의대, 법대만을 선호하는 학문의 편식 현상이 국가 장래를 어둡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그는 "수십 년 동안 과학 정책이 정치적으로 결정되고 고위 공직자들이 인기위주의 정책을 편 것이 이런 위기를 초래했다"면서 "단시일 내에 결과가 나오지 않는 기초학문, 비인기 학문에 대한 일관된 정부의 관심과 투자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아폴로 13호는 우주선의 산소 탱크가 폭발하는 사고로 달에 착륙하지 못하고 며칠 뒤 지구로 귀환했다. 그 당시 지구에 와 코센에 안착해 있는 김 박사에게 더욱 왕성한 활동을 기대하는 건 코센 가족 모두의 바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