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종교 속에서 현대가 공존하는, 아.. 인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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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제 2의 고향이 되어버린 수도 델리로 다양한 (?) 친구들과 또다른 여행을 시작했다. 델리는 무굴제국 (13세기)때 수도가 된 올드델리와 대영식민시기 (1911년)에 형성된 뉴델리가 각 북쪽과 남쪽으로 나뉜다. 대한민국 토지의 약 33배를 차지하는 거대 인도땅에는 크게 5개의 큰 도시-북쪽에 델리,동쪽에 꼴까따, 서쪽에 뭄바이, 중간의 하이데라바드 그리고 남쪽에 첸나이-가 있는데, 델리는 정치적인 수도역할을 한다. 구 영국제국치하의 수도였던 꼴까따는 빈민의 어머니, 마더테레사와 아시아의 첫 노벨 (문학)상 (1913년) 수상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그리고 아시아 첫 노벨 물리학 (과학)상 (1930년) 수상자인 찬드라세카 벵카타 라만 교수로 유명하다. 뭄바이는 상업과 영화산업의 중심지이고, 하이데라바드는 이슬람 문화와 역사가 현재까지 지배되는 곳으로 진주가 유명하다. 첸나이는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이다. 이곳은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였던 도마 사도가 순교하였다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여, 성 도마의 흔적을 갖고 있는 교회가 있다.
한국과 인도의 정치 및 경제 외교관계는 해마다 발전하고 있는 추세다. 김영삼, 노무현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기간에 인도를 방문하셨고, 과학자 출신의 인도 12대 대통령 압둘 깔람도 2006년 한국을 방문했었다. 90년대부터 엘지와 삼성전자가 델리에 자리를 잡았고, 현대자동차는 첸나이에 공장을 세우는 등 인도 곳곳에 우수한 우리나라 제품들을 공급하고 있다. 과학분야에서는 1986년 양국간 MOU를 설립한 이후, 점진적으로 발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2005년 노 전 대통령의 방문시 한국은 NT분야와 IT (hard ware)의 강점을 그리고 인도는 IT (soft ware)의 강점을 서로 협력 보완해나가자는 합의를 갖기도 했다.
델리-대통령궁, 인디아게이트
1947년 8월 15일, 간디, 네루 (인도 초대 수상), 지나 (초대 파키스탄 수상) 등이이끌었던 ‘비폭력 무저항주의’가 드디어 독립을 이루어 냈다. 제 1차 세계 대전에 참가했던 인도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적갈색 흙으로 이어진 길 (라즈파스 (왕의 길)) 끝에 인디아게이트 (위령탑) (사진 오른쪽)를 세우고 (규칙적인 정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을 밝히는 주황 등은 365일 꺼지지 않게 하였다. 주변은 의회당과 정부 청사들 및 정치 리더들의 주택이 에워싸고 있다. 맞은 편 끝에 위치한 대통령궁 (사진 왼쪽)은 영국총독의 집무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챤디갈 ? Rock garden
현존하는 인도예술가, Neck Chand가 약 20년을 들여 만든 이 공원은 놀이동산에 버금가는
지역에 페품을 이용하여 만든 조형 및 예술품들이 자연 친화적으로 어우러져 볼 만한다. 연인 및 친구들과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에도 좋다. 구역 구역들을 지나 휴게소 구역에 이르면 음료수를 마시기도 하고 낙타를 타볼 수도 있다. 오른쪽 위는 폐 변기 및 세면대를 이용해 모자이크를 장식을 하였고, 아래는 인도 여인들의 팔찌 (유리 뱅글) 조각들을 모아 사람 조형물을 세웠다. 약 두시간 동안 락 가든을 다 돌고 나오니, 기다리던 인도 친구가 도착하였다. 한국에서 불법이주노동자였던 친구는 성실하게 벌어온 자본으로 챤디갈 외곽지역-인도의 약 300개에 달하는 제약회사공장들이 모인-에서 시작한 제약품의 부수작업에 관련된 작은 사업체를 보여주었다. 맛나는 점심도 대접해 주고, 정말 오랜만에 ‘有朋 自遠訪來 不亦樂乎’했다.
바라나시-바나라시 힌두 대학교 (BHU), 겐지스강의 아르뜨
BHU는 예전 힌두의 전통과 후광으로 세워진 학교로 지금까지 그 긍지가 대단하다. 타원모양의 넓은 캠퍼스 (왼쪽 사진) 안에도 시바를 섬기는 사원이 있다. 오래된 학과 건물 및 도서관은 필자의 눈에는 전통스럽기만 하다만...델리대 수학시절부터 느끼는 건데, ’이 학교 출신자들의 자긍심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항상 궁금했다.
올해의 이상 기후 현상은 인도대륙도 덮었는데, 몬순시기가 정확하지 않게 지나가고 있었다. 여전한 간헐적 비로 겐지스강 (강가)은 강둑까지 범람한 상태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기원전 1,500년경 인도의 북쪽에서 침입한 소수의 아리안 족은 자신들의 우수한 철기문화와 싼스트리트 문자로 이뤄진 베다문학 등을 통해 기존 인도 현지인들 (드라비안 족)을 정복할 수 있었다. 특히, 브라만 (제사장 또는 교육자 계급)-크샤트리아 (왕이나 군사 계급)-바이샤 (상업을 담당하는 계급)-수드라 (농업을 담당하는 계급)의 ‘카스트 (16세기 교역을 하던 포루트칼 인들이 본인들의 개념으로 이해)’를 만들어 경전을 갖은 소수의 아리안 족이 브라만이 되어 쉽게 다스릴 수 있었다 한다 (현 가장 신뢰되는 카스트의 기원).
이 베다시대에 지워진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서사시인 ‘마하바라트 (처음 인도로 들어온 아리안 족 간의 영토 확보 전쟁에 관한 내용으로, 브라만 중심의 종교적 인도 문화를 심어주며 선과 악의 대치구조를 보여준다. 이 대하서사시의 핵심은 사촌형제간의 마지막 전쟁터에서 비쉬누의 화신인 크리쉬나가 선 (진리)을 위한 이 전쟁의 타당성을 피력하는 부분인데, 이 분량이 바로 ‘바그바드 기타’이다.)’에 나오는 초기 선한 인간 왕의 부인이 되는 여신 강가의 모체가 된다. 윤회를 믿는 인도인들에게는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죄가 ?어지고, 죽어서 화장되어 이 강에 뿌려지면 내세에서 윤회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종교적 핵심이 되는 겐지스 강주변으로는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모여 살거나 힌두교 사두들 (수도자)의 천국이 된다. 오른쪽 사진은 매일 오후 7시에 성스런 강 겐지스앞에서 힌두 제사장들 (빤딛)이 벌리는 아르띠 (예배의식)의 장면이다. 어느 종교에서 처럼, 이 곳에서도 상업주의 (manmonism)로의 변색이 있다.
화장된 시체가루와 동물의 목욕에, 빨래까지 더해지는 이 물에 인도인들은 몸을 담그고 마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브라만 출신의 지도교수님 (Prof. K. Muralidhar, Hormone Research Laboratory, 델리대 동물학과)께 들은 얘긴데…아직까지 찾아보지 못했다. 인도인들이 그렇게 더러운 겐지스 강물에 목욕을 하거나 마셔도 아직까지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거대하게 보고된 적이 없는데, 교수님의 친구분인 한 인도 미생물연구자가 그 물을 연구했더니, 아직까지 보고된 바가 없는 물을 정화시키는 미생물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세계적 저널에 보고하였다고 하는데…누군가 찾게 되면, 필자에게도 알려주면 고맙겠다.
개인적으로, 전통을 고수하고 정리되지 않은 도시, 바라나시를 방문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몇년 전, 재인 한국대사관 사건사고담당 영사가 델리 한인회보에 올린 글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바라나시…이 혼란의 도시…종교성이 강한, 영적인 곳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정신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아그라-타지마할
당시 작은 대영제국이 큰나라 인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행한 일 중에서 지금까지도 칭찬받는 몇가지가 있는데, 각 주를 나누어 행정화시킨 것 외에, 영어를 보급한 것, 인도 전역에 철도를 설치한 것 그리고 체계적인 군대를 설립한 것들이 주요하게 꼽힌다.
이 문화유산들을 통한 관광수입이 주 수입원이 되는 아그라에서 주의할 것은, 신뢰할만한 음식점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경제적 부담이 없다면, 오성급 호텔로 가시면 별탈 없지만, 음식점과 인근 병원이 협력 (?)하여 식중독 환자를 유발시킨다는 얘기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 학위과정 중, 특강 세미나차 미국에서 초청된 교수님을 안내한 적이 있었는데, 현지 친구들의 강권 (?)으로 들어간 인근 음식점을 다녀온 후, 필자만 약 2주를 열병으로 고생했던 경험이 있다 (그 교수님은 바로 공항으로 가셨는데, 어떻게 되셨을까…궁금하다.). 택시로 아그라 들어오기 전, 고속도로에 위치한 맥도날드에서 오랜만에 미국식 기름진 패스트 음식을 즐기기를 바란다.
필자도 유학시절, 종종 아그라 관광 가이드로 생활고를 면할 수 있었으니 아그라가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기에는 부족함은 없는 곳이라 생각한다. ㅎㅎㅎ… 아, 땀난다. 그래도 몇년 만에 온 이곳에서 변한 것은 있었다. 작년 가을 델리에서 ‘Common Wealth Game (대영식민하에 있었던 국가간의 올림픽게임)’이 개최대면서 델리 공항 및 시내 전역에 이어 인근 관광지인 이곳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어 보인다. 주차장에서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과정이 보다 편리해졌다는 점.
‘타지마할’, 샤자한 왕의 세번째 부인인, 뭄타즈의 묘지로 그 사연이 세기적이다. 주황 빛 갈색 외곽문을 통해 들어가면 저 멀리 햇빛 아래 하얀 대리석 성이 눈부시다. 무굴제국의 위대한 왕 악바르대제의 손자, 샤자한이 왕위에 올라 부인으로 맞이한 뭄타즈는 그리 아름다운 지는 몰라도, 샤자한 왕의 사랑을 받아 15명의 아이를 낳았단다. 마지막 아이를 낳으면서, 39세의 나이로 죽게 되는데, 사랑하는 남편에게 유언을 남겼단다. 하나는 재혼하지 말것과 다른 하나는 그녀를 위해 아름다운 묘지를 만들어 달라는 것. 사쟈한은 타지의 무덤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고자, 라자스탄 및 페르시아, 이란 등에서 최상의 대리석과 준보석들을 사들이고 최고의 기술자들을 불러 22년에 걸쳐 건축하게 했다.건물 앞에 길게 놓여진 정원은 가운데로 야무나 강물을 끌여들여 흐르게 좌우로 다양한 나무와 꽃들로 꾸며졌다. 이 사랑하는 아내의 무덤이 완성되고서는, 제 2의 타지마할이 세워지지 않도록 제일 건축자의 손목을 잘랐다고 한다…절대자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이 사랑을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겠다.
그런데, 이 타지마할에는 또다른 사실이 숨겨져 있다 한다. 무슬림이던 샤자한은 수피니즘에 아주 심취한 교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타지마할을 정성들여 지으면서, 자신의 신앙심을 깊게 내포시켰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정원은 천국을 형상화시킨 것이고, 이 정원을 따라 놓인 길을 따라 들어가면, 최후의 심판에 선한 자만이 들어가는 곳 (묘성)을 통과할 수 있다 한다. 타지마할의 각 입구 주변에는 경전 (코란)의 귀절들을 검은색 돌로 음각으로 새겨 놓았다. 또한 묘성 양쪽으로 예배드리는 사원을 지었다. 샤자한이 야무나 강 건너에, 검은색으로 본인의 묘를 똑같이 지으려 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건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는데, 건축에 국고를 다 써버린 아버지의 사치에 분노를 안고, 수피니즘을 지속시키려는 큰형 (황세자)과의 종교적 갈등에서 왕위에 오른 아우랑제브 (세째 왕자)가 샤자한을 아그라성 옥탑방에 죽을 때까지 가뒀다고 한다. 샤자한은 그곳에서 매일 타지마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역사적인 배경을 떠나서, 건축학적인 면에서도 매우 가치가 있는 구조라고 한다. 각 모서리 점은 동서남북을 정확히 향하고, 타지마할 본 건물 사방으로 있는 망루들은 자연재해가 생겨도 바깥을 향해 무너지게 설계하여 아름다운 타지마할이 손상되지 않게 한다. 건축공학에 문외한인이어서, 필자는 전문가의 설명을 착실히 들으련다.
우리 일행은 정원 중간에 위치한 인공 연못 위로 올라가, 예전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살아 생전 앉았다는 일명 ’다이애나 황태자비 벤치’에 앉아 한 컷.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수 있다. (경험으로는..독사진을 추천한다.) 이 벤치엔 역사적인 인물들이 앉아 갔다. 빌 클린턴, 사코지 대통령,…필자. ㅋㅋ
첸나이-안나공대, AU-KBC Research Center
남인도인은 아리안 족이 들어올 때, 원주민에 해당된다고 본다. 이들은 싼스크리트어의 현재언어인 힌디를 사용하지 않고 타믈어를 사용한다. 생활을 위해 겨우 힌디를 구사해내는 필자에게는 연구소를 벗어나서는 여간 어려운 곳이 아닐 수 없다.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주 음식도, 문화도 북인도의 그 것과 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몇몇 단어들이 (엄마, 아빠, 언니, 와, 가, 등) 한국어와 같다 (어순은 타믈어와 더불어 힌디도 한국어와 같긴하다.). 그 외에, 음식 문화도 한국과 비슷한 편이다. 북인도는 로띠라는 납작한 밀빵에 걸죽한 커리를 먹는데, 남인도는 쌀밥에 삼바라는 국을 먹는다. 남인도인들은 북인도인보다 좀 더 보수적이고, 점잖고 친절하다. 쌀밥을 먹는 문화도 그렇다. 서울대 국악과의 한 교수님이 이곳 타밀에서 한국 고대 문화예술의 기원 (예, 국악 장단 및 악기, 고구려의 무용, 언어 등)을 찾기도 하셨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필자는 개인적으로 델리보다 첸나이가 편하게 느껴진다. 인도 사람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도 덜하다.
그러나 이곳에도 최악의 꺼리들은 있다. 대중교통의 불편함이 아직 개선되지 않은 점인데, 삼발이 차들은 절대로 미터기로 움직이는 법이 없고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불러대는데, 통제가 없다…도시 규모에 비해, 전철의 운행이 늦은 편이다. 지금 첸나이는 전역에 전철설계공사를 진행 시키고 있다.
필자가 몇가지 확인 연구를 하기위해 안나공대 MIT (마드라스 공학연구소) 캠퍼스에 있는 AU-KBC 연구소의 Dr. Suvro Chatterjee의 혈관 생물학 연구실에 와있다.
이제 친숙해진 이곳의 게스트 하우스와 기숙사 식당 음식들은 장기간만 아니면 즐길 수 있겠다. 첸나이 외곽 공항 근처에 위치한 이 곳의 주변에는 외국인 또는 젊은이들이 즐길만한 카페테리아나 유흥 (?) 장소는 없다. 연구하기 딱 좋은 환경이란 생각이 든다. 이 캠퍼스에는 재임기때 인도 미사일 산업을 크게 발전시키는데 주력하셨다는 12대 대통령, 압둘 깔람이 수학하신 항공학과 (왼쪽 사진)가 있다. 해마다 한 번씩은 모교를 방문하신다는데, 필자는 주로 그 분이 오고 가신 다음날에 찾아 왔다. 이번에도 그랬다. 압둘 깔람, 인도 전 대통령은 지금도 존경 받는 인물이다. 연구에 헌신되어, 결혼식 날짜도 잊어 버리고 연구에 열중하여서 신부 측에 큰 실례를 범한 죄로 스스로 독신의 삶을 살고 계신다고 한다.
이 교정을 지나면 그 뒤로 필자가 출근하는 연구소가 보인다. 이 타지에서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준 연구실 동료들이, Swaraj (오른쪽 사진, 왼쪽에서 다섯번째)-필자의 형제가 되어 보호자 역할을 해주는-친구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다. 아침에 그가 인도 미타이 (단과자)를 돌리면 저녁에 케?과 인도 스낵들로 잔치가 벌어진다. 축하를 위한 인도 춤도 서슴지 않는다.
Dr. Suvro Chatterjee는 angiogenesis와 관련하여 NO 생성 pathway를 연구하시는 분으로, 필자의 학위논문 및 연구에 큰 조력자가 되어 주신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도 관계를 맺고 있다. 2012년 국제 angiogenesis 학회가 이 곳 첸나이에서 개최된다고 하는데, 그 학회의 조직위원중 한 분이시다. 필자도 그 때 발표할 것을 준비하고자 연구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계획한 것들을 주어진 시간과 환경에서 잘 마무리하고 본 여행을 마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인도여행에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문의하기를 바란다. 시대를 초월하는 미지의 인도로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