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미래 10년과 함께한 ISB 교환학생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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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은 개인적으로 인생에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 시기였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공학 석사 과정 시절, 학부 때부터 갈망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한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프랑스 파리의 한 학교로 가고 싶었지만 학사일정이 맞지 않아 자칫 잘못하면 졸업이 한 학기가 늦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던 차에 학교 책자를 보다가 인도에 ISB(Indian School of Business)라는 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류시화 시인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고 꼭 한번 인도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런 ‘불순한’ 의도가 내 인도 교환학생의 시발점이 되었다.
ISB 캠퍼스 전경. 캠퍼스 전역에 잔디가 깔려있고 심지어 실외 골프 연습장도 있다.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은 항상 3인 일조로 다녔던 것 같던데, 학생들끼리 우스개 소리로 “한 명이 일을 하고 한 명이 옆에서 보조를 하고, 마지막 한 사람이 감독을 한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일을 하는 것 같이 보였고, 인도에서는 생산성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여느 여행자가 겪는 것과 같이 인도 도착 직후의 혼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도착 시간이 새벽 1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꽤 많은 항공편이 그 시간대에 도착해서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수화물을 다 찾고 나오는데, “Police Taxi Driver License”라는 팻말을 든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장시간 비행에 지친 탓에 그냥 뻔한 호객행위인 것을 알지만 학교로 가는 택시를 타기 위해 한 사람을 따라 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바로 앞의 택시를 타는 것이 아니라 공항 버스를 타고 2코스를 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약간 이상하긴 했지만, 이미 그 사람이 내 캐리어를 끌고 앞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그 밝던 공항과는 다르게 어두컴컴한 공터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사람은 그 한 곳을 가리키더니 검정색 밴에 타라고 한다. 손에 땀이 나는 것과 동시에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버리고 도망을 갈까 생각을 해봤지만 이미 내 여권과 꽤 많은 여비가 캐리어 속에 있었던 터라 일단 타기로 했다. 택시를 탄 후, 무슨 일이 일어날까 노심초사 하고 있던 나에게 기사가 말을 건 냈다. 짧은 영어로 여러 가지 말을 했지만, 요지는 애시 당초 흥정했던 금액의 2배를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택시 요금을 흥정하는 것을 보니 큰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탄 택시는 정식 택시 영업 허가증이 없는 택시라서 공항 바로 앞에서 손님을 태울 수 없는 데다가 원래 나오는 금액의 2배 가까이 나오는 택시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긴 했지만, 인도 여행을 쭉 다니면서 느낀점은 대체적으로 악(惡)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다만 그들이 여행자들을 마냥 부국(富國)에서 온 사람들이라 자신들이 이렇게 돈을 더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경험 덕분에 그 뒤로 인도에서 택시나 릭샤(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만든 이동수단) 요금을 흥정할 때 바가지 쓴 일이 거의 없었다.
대중적인 교통 수단인 릭샤. 미터기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고 거리를 지레 짐작해서 지역에 맞게 흥정을 해야 한다. 인도 전역에서 거의 항상 2배이상의 가격을 먼저 불렀었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주변 친구들 덕분에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몇 가지 차이점이 쉽게 발견되었다. 제일 신기했었던 것은 화장실 어디를 가도 휴지가 없는 것이었다. 영국 및 캐나다 등에서 어릴 때부터 유학생활을 했던 인도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자신들도 화장실에서 휴지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이들의 정서나 가치관은 서양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별 이질감을 느끼진 못했지만 이런 생활 양식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그들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교환학생을 마치던 시기까지 여자친구가 없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1달도 안되어서 결혼을 한다고 선언을 했었다. 알고 보니 중매결혼 이었다. 인도의 엘리트 계층에서도 이런 식으로 별자리와 태어난 시간 등을 가지고 부모에 의해 중매결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한다.
내가 있던 시기에 유럽 친구들이 꽤 많이 왔었다. 같은 층에 살던 네덜란드 친구 한 명이 미슐랭 가이드에 오른 프랑스 식당에서 일을 한 덕에 매주 주말이면 꽤 괜찮은 점심을 만들어주곤 했었다. 자연스럽게 이들과 같이 여행을 많이 다니게 되었는데, 모든 여행이 그렇듯, 아무리 힘든 상황이 있어도 같이 다닌 사람들 때문에 항상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행 메이트. 학교에서 만난 인도인 친구 한 명이 인도 전 지역을 다니는 광역버스회사 사장인 삼촌이 있어 북인도 라자흐스탄 지방을 다닐 때 큰 도움을 얻었다. 무료로 버스를 타고 숙박을 했었고, 특정 지역에서는 수행 비서(왼쪽사진 붉은 계열의 셔츠)가 가이드 역할까지 해주었다. 사소한 것까지 먼저 신경 쓰면서 베풀어 주는 것이 한국 사람들과 비슷하게 정이 많았던 것 같다.
정통 인도 요리 음식점의 주방. 전직 연방 판사가 운영하는 곳으로 밖에는 놀이 기구와 코끼리와 낙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원래 외부인에게 공개가 되지 않지만, 인도 친구 삼촌의 도움으로 실내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서구화 된 조리 광경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이런 장면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인도 전통 베이커리인 난과 커리가 조리되고 있는 광경.
한 학기 동안 있으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인도의 미래는 밝다.”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지식층이 자기 자신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를 하고 있다. 단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앞서 말했던 대로 글로벌 기업 본사에서 일하는 인도인들이 단시일 내에 자국으로 돌아와서 창업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상당 수가 있었고, 학기 중에 이미 창업을 해서 운영을 하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인재 유출 현상이 심각한 한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게다가 인도의 사회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사회적 기업에 관심이 지대해서 자신의 재능을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찾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실제로 사회적 기업 규모 측면에서 인도는 세계 최대라고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카스트 제도가 철폐되긴 했지만, 사회 전반적인 계층적 불평등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대들이 이런 측면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제 다시 인도를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 술자리에서 열띤 토론을 하던 친구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단순한 여행의 즐거움 보다는 좀 더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글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저도 인도에 대한 관심이 커서 더욱 재미있게 느꼈던것 같네요. 저는 인도와 가까이 있는 싱가포르에 있고 덕분에 주변에 인도 동료도 무척 많습니다. 인도의 문화와 또 미래에 대해서 조화롭게 글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