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에서 쉬어가기 [양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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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은 제가 간절히 이루고 싶었던 것을 성취해서 참으로 뜻 깊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박사 2년차 학생으로써, 속된 말로 있는 힘, 없는 힘, 있는 힘껏 용을 쓰며 달려왔던 시간이라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힘들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게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주기 위해, 그리고 2012년도 더욱 ‘으?으?’하자는 나름의 합리화로 연구실 겨울휴가를 맞아 3박 4일간 제주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부산발 제주행 아침 비행기에 몸을 싣고, 구름 위에서 마시는 제주감귤주스는 여행의 설렘을 안고 있어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 꿀맛이더군요. 늘 마주하는 익숙한 현상들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는지에 따라, 느껴지는 감정이 이렇게나 달라지는구나 새삼 깨달으며 제주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안개 낀 제주국제공항에서 동일주 해안도로를 타고 첫번째 목적지인 월정리 ‘아일랜드 조르바’로 향합니다. 왠지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날 것 같은 기대감을 안고 말이죠. 안개 낀 하늘과 제주에 유독 많다는 푸릇한 마늘밭, 여기가 외국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될 곱디고운 하얀 모래와 산호빛 바다 색깔은 감동 또 감동이었습니다. 장갑과 목도리와 두툼한 패팅점퍼를 벗어 던지고, 타닥타닥 오렌지빛 불꽃을 내며 타고 있는 난로 앞에서 제주 바람과 추위에 꽁꽁 언 손을 녹이며 마시는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은 정말 최고의 맛이었습니다. 인도느낌이 충만한 주인 언니의 우클렐레 연주와 노래까지 덤으로 들으면서요.
‘여행 시작부터 이렇게 좋으면 어떡하지?’ 란 기분 좋은 걱정을 하며 다시 동일주 해안도로를 달려 성산일출봉으로 향합니다. 일출봉 초입의 편의점에 들러 텀블러에 따뜻한 차를 담고, 씩씩하게 정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평탄해 보였던 길이 어느새 현기증이 날 정도의 경사로 이어져, 잠시 숨 돌리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섭지코지와 발 아래 펼쳐진 진한 초록빛 제주바다, 그리고 봄이면 온통 유채꽃으로 뒤 덮힐 갈색 옷을 입은 들판이 보이더군요. 정상에서 본 안개를 머금은 수평선이 참 운치 있었습니다. 다만 중국인의 멈출 줄 모르는 수다가 좀 거슬리긴 했지만요.
섭지코지는 정말 차가 없으면 가기 힘든 곳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인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라지만 저는 안도 타다오의 글라스 하우스와 지니어스 로사이가 목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섭지코지는 굉장히 상업적인 곳이라 생각했었는데 인공의 미와 자연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글라스 하우스 내의 민트에서 사방으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늦은 점심을 먹고 (굴이 들어간 파스타였는데 전 좀 별로였습니다), ‘명상’ 이란 뜻을 가진 지니어스 로사이로 내부로 들어가자 저를 중심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펼쳐지더군요. 특히 홍해를 가르는 모세의 기적처럼, 물줄기가 시원스레 떨어지는 양쪽의 돌벽 사이로 걸어 들어가 만나는 네모난 콘크리트 창 너머의 성산일출봉의 모습을 보곤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지니어스 로사이는 정말 절제된 깔끔함 그 자체였습니다. 산책로를 따라서 등대길, 올인 촬영지였던 성당 앞을 지나다 보니 봄에 유채꽃이 만발할 땐 어떤 모습일지 꼭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여행을 할 때 특히, 잠자리에 매우 민감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는데 이게 왠일입니까?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요. 돌아가는 비행기 표 없이 몇 달이고 여행하는 사람들, 바리스타, 여행사 사장님, 학생, 각종 직업을 가진 사람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사람들이란 사실이 저를 마음 편하게 했는지 제가 느끼고 생각하던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되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고, 슬퍼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정말 오랜만에 마음껏 솔직해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는 아무것도 얽매이지 말고,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고, 내가 보고 싶은 것 보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용히 생각도 많이 하고 좀 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관광지엔 되도록 가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 와중에 제가 꼭 가고 깊었던 곳이 바로 ‘김영갑 갤러리’입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고작 10분 거리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큰 길에 떡하니 위치하고 있었지만 네비게이션 고장으로 갤러리를 지척에 두고도 스윽 지나치는 바람에 돈 주고도 구경 못할 멋진 억새밭 사이길을 지나갈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했지요. 이런 소소한 즐거움에 또 한번 제주가 좋아졌습니다.
김영갑 갤러리는 한마디로 참 담백했습니다. 잘 보이고 싶어 일부러 과하게 꾸미지 않은 소박한 맛이 제대로 살아있었습니다. 사진들 또한 그러했구요. 단 한번의 흔들림도 없이 오롯이 한 길만을 걸어온 작가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져서 제가 선택할 길에 대해 고민하고, 또 오롯이 몰입하지 못하는 저 스스로가 굉장히 부끄럽게 느껴졌었습니다.
[ 누구나 크든 작든 한 덩이의 한은 가지고 있지만 묵묵하게 자기 몫의 삶에 열중한다. 온갖 두려움과 불안, 유혹 따위를 극복하고 삶에 열중한다. 원하는 순간이 오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철저한 준비 뒤에 얻는 사진의 감동을 따라갈 수는 없다. 행운은 사진가 스스로 준비해서 맞이하는 것이다. ]
제주에 왔으면 올레길은 한 번 걸어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올레 6코스 걸었습니다. 올레길.. 만만하게 봤다가 제대로 큰 코 다쳤습니다. 6코스의 시작인 쇠소깍은 제주시에 있는 용연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매서운 바다 바람에도 불구하고 노랑, 보라 빛의 들꽃들이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유채꽃, 그리고 제지기 오름에서 바라보이는 눈덮힌 한라산까지.. 사계절을 모두 만났습니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일정한 간격마다 나무에 걸려있는 분홍색, 파랑색 리본이었습니다. 해가 일찍 저셔 날은 어둑어둑해지는데 인적도 없고 혹, 길을 잃은 건 아닌지 걱정이 스윽 밀려올 때, 저 멀리 보이는 바람에 흩날리는 리본이 어찌나 반갑던지요. 그 리본 옆에 새초롬히 걸려있던 사과 간판 (국밥집 간판이었습니다)을 보는 순간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센스가 보통이 아닌가 봅니다.
제주여행을 하는 동안 기당 미술관과 이중섭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제주 어디를 가든 눈덮힌 한라산이 보여서 참 신기했습니다. 저 멀리 한라산이 보이는 높지 않은 산 등성이에 아담하게 위치한 기당 미술관에선 관람객이 한 명도 없어서 변시지 화백의 작품들이 마치 다 제 것 인양 우쭐하게 감상했었습니다.
이중섭 미술관은 음.. 기대한 것만큼 작품 수가 많지는 않았고, 2층에서 전시되고 있던 기획전 또한 작품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컬렉션이 상당히 알찼습니다 (김환기, 김기창, 이응노, 박수근, 백남준, 장욱진 등등). 특히 제가 좋아하는 이대원 작가의 그림을 만나서 참 반가웠습니다. (지금껏 본 이대원 작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여행을 할 때마다 비타민 워터를 손에 놓지 않는데요, 늘 드래곤후르츠 맛을 선택합니다. 이걸 고집하는 이유는 맛 소개 글이 너무 웃겨서인데 이걸 마시면 없던 힘도 불끈불끈 솟을 것 같은 기대감이 늘 듭니다.
[ 초능력이 있어서 스판옷을 입는 걸까요? 스판옷을 입으면 초능력이 생기는 걸까요?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무슨 맨과 우면들은 죄다 스판을 입고 뛰고 난리더라구요. 스판 옷이라도 입어야겠다 싶을 정도로 힘이 필요한 당신! ]
비타민 워터를 손에 쥐고 대평포구 근처의 조안베어 뮤지엄으로 이동합니다. 테디베어 박물관은 관광객도 많고 너무 식상한 코스인 것 같아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조안베어 뮤지엄은 우선 한적하기도 하고 또 배용준을 모티프로 한 준베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한 때, 제가 욘사마의 팬이었습니다).
제주에 있는 동안 종종 비도 오고 날씨가 썩 좋지는 않았는데 부산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 오니 날씨가 좋아지더군요. 정말 봄날씨였습니다. 박수기정이 보이는 대평포구에서 살랑살랑 딱 좋은 바다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잠시 머물다, 장선우 감독이 주인이라는 근처 물고기 카페에 갔습니다. 캡슐 커피 한 잔에 오천원이라니.. 비싸다 생각했지만 창 밖 풍경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특급호텔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주에서 정말 살고 싶다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제주에서의 마지막 일정.. 대평리 박수기정을 바라보며 맞이하는 일몰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괜시리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이 제주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정말 편안한 저녁을 보내고, 또 제가 감히 제주 명물이라 칭하고 싶은 우리쌀 제주 유산균 막걸리를 마시면서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할 때 만해도 날씨가 좋았는데 제주도 제가 떠나는 게 싫었던 모양인지 비행기가 뜰 수 있을 까 싶게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살짝 아예 비행기가 못 떴으면 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아쉬웠어요. 참 잘 쉬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생각도 많이 한 여행이었습니다. 다음날 연구실에 출근하니 정말 3박 4일간의 제주 여행이 한낮 일장춘몽처럼 아득하더라구요. 괜시리 머쓱해서 웃음이 났습니다. 지금은 간간히 사진으로나마 추억하는데요. 제가 찍은 겨울 제주의 풍경들 보시고 저처럼 위로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 표를 사시실 바래봅니다.
역시 제주도 최고인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