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일본에서 16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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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일본에 살고 있는 이원재라고 합니다. 저는 대학을 한국에서 졸업하고 일본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코스와 사회생활을 고민하다가 사회생활로 진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 산 지가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일본에서 살게 되었고, 그 후 아이들이 태어나 현재 가족은 5명입니다. 아이들은 현재 고1, 중2, 중1입니다.
이번 글은 부탁받았을 때 대학이나 연구소에 몸 담고 있지 않아서 자격이 미달이다고 생각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내와 이야기를 하던중, 우리가 고급정보는 쓸 수 없지만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본 생활밀접한 생활이야기는 할 수 있지 않을까해서 몇자 적게 되었습니다. 글의 구성은 첫번째 이야기는 제가 일본이라는 사회와 회사생활이야기를 , 두번째 이야기는 아내가 아이셋과의 좌충우돌 속에 느낀 이야기를 나눠서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저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생활의 도전의 연속임을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초기의 10년간은 웃고 울고 고민하는 도전하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대학 및 연구소 소개는 현재 본인이 몸담고 있지 않은 관계로 생략하고, 일본 회사생활과 배우자의 생활 그리고 자녀 교육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본인은 석사과정으로 도서관 정보 대학(쓰쿠바 대학)에서 정보학을 전공하였으며, 논문은 ‘일한번역에 있어서 れる、られる해석’을 연구 테마로 하였습니다. 문법적 요소를 파악하기 위해 교토(京都)대학의 일본어 형태소 해석 시스템 JUMAN을 사용하여 각기 수동, 가능, 존경, 자발로의 번역 패턴을 프로그램으로 구현하고, 그 번역 패턴을 증명하기 위해 마이니치 신문 기사를 검증 데이터로 사용했습니다. 석사 과정을 마침과 동시에 박사 과정에 가서 지도교수와 조교수에게 학문적으로 당당히 소통하고 싶어서 사회에 진출해서 배운뒤 다시 박사과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90년대 일본의 불황이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일본은 1억이 넘는 국내 시장이 있어서인지 꾸준히 신입채용은 이루어지고 있으며, 우리 나라와 같은 청년 실업은 사회 문제로 다루어지지는 않는 모양새입니다. 한일 양국 모두 해외 시장 의존도는 크나 내수 시장만으로도 유지가 되는 직종이 다수 존재합니다.
신규 프로젝트 진행을 하는데 있어서 여유있는 예산책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계발 예산과 보수 예산을 1대1로 구성하여 프로젝트 계발이 끝난 끝난 후에도 보수 작업은 계속 됩니다. 프로젝트 계획에 있어서 작업의 적량화가 도입되고 문제점, 사양변경을 대응하기 위한 버퍼가 고려되는 스케쥴을 고려되고 있으나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작업이 야근 대응이 필요하게 됩니다. 야근문화는 보통 8, 9시까지는 아무것도 먹지않고 일을 하고, 10시 이후에 귀가하여 석식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물론 편의점에 가서 과자 비스켓류 사서 대강 때우는 직장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간식거리를 취하지 않고 2, 3시간 집중해서 남은 일을 처리하는 분위기이지요. 직장인들 점식은 어떻게 해결할까요? 편의점 등에서 도시락을 사거나 집에서 지참하여 본인 데스크, 공원 의자나 건물 휴식공간에서 때우고, 나머지는 식당에서 간단히 해결합니다.
공원에서 식사하는 직장인들
전체적으로 일본 사람들은 꼼꼼하며 문서작성에 있어서는 단어, 구두점까지 세세한 부분까지 체크합니다. 그러나 신기술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예를들면, 웝서버를 도입하는데 있어서 안전성이 검증된 구버전이 도입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신기술을 바로 도입하는 한국과는 대조적이지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술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될지 일본 사회가 재고해야만 하는 과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연히도 사는 곳은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간단히 소개를 드릴까 합니다. 회사 사유로 10년전 사이타마켄(埼玉?) 이루마시(入間市)로 이사하고 단독 주택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회사 상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이곳은 한국과 참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바로 이웃 도시 히다카시(日高市)에는 고려신사가 존재합니다. 고려천(高麗川)을 끼고 고려 초등학교(高麗小?校), 고려 중학교(高麗中?校), 고려 우체국(高麗郵便局), 고려 신사(高麗神社)등이 존재한답니다. 고려 신사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망국 고구려의 유민을 이끌고 망명한 왕자 약광(若光)을 모신 곳으로, 1916년에는 고려건군 1300년 행사가 성대히 열렸습니다.
고려신사는 일본 국내에서는 출세 운이 있는 신사로 유명하여 일본 정객들이 참배하는 곳이며, 한국 유력 정치인들도 찾아가는 곳입니다.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에게는 고려역 근처를 걸어만 다녀도 고구려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군 건국 1300년 기념 행사 캐랙터(출처:히다카시)
고려군 건국 1300년 기념 행사에서 고구려 왕자 약광역을 하는 히다카 시장 (출처:히다카시)
고려역 (출처:Wikipedia)
20대초반에 혼자 온 유학은 외국생활의 20페센트쯤 산 것이고, 20대 후반에 배우자와 생활은 50 퍼센트, 아이들이 있어서 부딪치며 살아봐야만 진정한 외국생활을 해봤다고 말할 수 있다고 여기 사는 저희들은 이야기합니다. 제가 16년간 이곳에서 아이들 셋과 살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절대로 녹녹치 않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이력과 자격이 부족한 제가 남편의 글에 +1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혹시 외국에서의 생활을 생각해보거나 계획하시는 분이 있다면 본인의 생각뿐 아니라 배우자의 각오와 생각을 충분히 고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제 주변인의 이야기임을 양해바랍니다.
가족의 좌충우돌의 시작 - 아이의 태아나고 3살까지
결혼하고 신혼으로 시작된 일본생활은 너무 좋더군요. 조용하고 깨끗하고 친절하고 편안한 매일 매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어린이날에 날리는 고이노보리
마냥 편안하고 즐거운 외국생활의 1-2년. 아사쿠사
그리고,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5개월쯤 지나니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외로운 외국생활을 실감하며 아이하고 둘만 있는 하루가 조금씩 길게 느껴지고 육아에 대한 불안함과 우울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아이가 걷기 시작할 때쯤 아파트 놀이터에 큰 용기내어 데뷰를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인생계획에 없던 일본생활이라 일본어를 이곳에 오는 비행기속에서 처음 외운 왕초보였습니다. 만나는 엄마들은 모두 친절하고 장난감도 잘 빌려주고 좋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2-3살된 아이들의 작은 트러블에서 오는 엄마의 자괴감입니다. 서로 장난감을 먼저 갖겠다고 울기도 하고, 미끄럼틀을 먼저 타겠다고 밀치다 넘어지기고 하는 정말 작은 귀여운 트러블,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터러블조차 부드럽게 일본어로 설명이 안돼 (아리가토나 스미마생)과 바보같은 웃음으로 해결하는 저의 바닥수준의 일본어에서 오는 자괴감과 가슴 답답함이 항상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트러블이 생길까 걱정되어서 우리 아이에게 양보를 자주 부탁했고, 그 트러블이 날 것 같은 장난감은 흔히 말하듯 돈지랄로 해결하듯 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중요한 성장과정의 중요한 싹을 미리 차단하고 있음에 미안했습니다. 아니라 다를까 유치원에 간 큰애가 장난감을 놀다가고 누가 달라면 줘버리고, 초등학교때는 잘못 쓴 곳을 지우려다가 짝궁이 빌려달라니 그래로 빌려주고 자기는 지우지도 못해서 가져온 공책을 보며 속이 상하더군요. 엄마의 불안한 외국어 생활이 아이에게 트러블기피증을 심어줬음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챙겨주던 고마운 히로유끼 엄마. 내가 고마운데 반대로 언제나 고맙다고 손편지를 보내곤 했다.
가족의 좌충우돌의 최고조 -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졸업까지
그렇게 쫌 불안하고 긴장하며 키우는 부모에게 성장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힘들겠습니까. 참고로 주변에 몇 안되는 한국가정의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초등 1학년때 아빠의 일로 일본에 온 정아씨네 둘째딸. 처음 와서 1달쯤 지나서 교실에서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답니다. 의사가 내린 진단명은 하고 싶은 말을 못해 답답함에서 온 스트레스. 그 말에 정아씨 부부는 얼마나 답답하면 그랬을까 싶어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은 영어, 일본어, 한국어가 되는 유능한 스튜디어스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모두 웃는 유치원 입학식장에서 엄마 치마자락을 붙잡고 안떨어지겠다고 우는 아이는 우리 큰 딸 혜린이와 온지 얼마 안되는 수희씨네 아들. 그래서 맨 뒷줄에 어린이의자 하나 더 놓고 엄마도 같이 앉아서 진행된 입학식.
그리고 입학한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일본가정사나 연예인등 모르는 이야기가 종종 나와 순간순간 당황하는 우리 아이, 어린이날이나 설날같은 날에 할머니를 비롯 친인척에게 선물받았다고 자랑하면 할말 없는 우리아이, 사촌들과 놀고 자고왔다는 주변 친구들이 부러운 아이, 긴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면 특별히 갈 곳도 오는 사람도 없어서 집에서 보내는 안쓰러운 우리 아이. 그때는 참 안쓰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노란 모자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일본 학교는 아이들의 안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합니다
외국생활은 가족끼리는 아주 단단해지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가족캠프.
가족의 죄충우돌 - 그 답을 찾다. 바로! 일본어교실
일본에는 시청에서 주관하는 외국인을 위한 일본어 교실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아주 아주 열심히 다녔습니다. 비용도 거의 무료고 아이도 같은 교실에서 보육선생님이 봐 준다고 하니 아이 셋을 업고 안고 유모차에 태우고 갔습니다. 선생님은 자원봉사자로 20명 정도로 40대에서 70대까지 은퇴한 교사나 회사원 주부 등이었습니다. 외국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분이 많아서 일본어뿐 아니라 외국생활의 힘듬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줘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바로 그곳 일본어교실…. 저의 일본생활의 많은 답이 있었습니다.
일본어교실은 엄마의 힐링 상담소
처음에 이 교실을 만든 이유는 외국인에게 생활의 기본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런에 직접 해보니 외국인에게 일본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낯선 외국에서 받는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마땅히 풀 데가 없다는 것임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곳을 따뜻한 고향집이다라고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풀고 용기내서 다시 밖의 세상으로 나가기를 바란다고 선생님들은 자주 말합니다. 우리 테이블에서는 일본어, 세금, 교육, 이웃트러블, 일본인의 가벼운 험담까지 서로 이야기하며 답을 찾고 위로도 많이 받습니다. 어느날 태국인 엄마가 유치원 스쿨버스에서 매일 만나는 일본인 엄마가 자기에게 뭐든지 가르치려하고 무시하는 것 같다며 흥분하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같은 테이블의 3, 4명도 미묘하지만 일본인한테 그런 느낌을 받은 적있다고 동의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저 이상한 일본사람 이라고 하지말고 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일본인인 자기에게도 안 맞는 사람이 주변에 반절이라고. 일본사람은 나랑 안맞는다고 하면 떠나는 것 밖에 답이 없지 않겠냐고, 저 사람은 이상해라고 하면 생각하고 고민할 여지가 있다고요. 저는 그 말이 정말 마음에 와 닿고 그 다음부터는 저 사람 이상해 라고 맘놓고 혼자 욕합니다.
일본어를 배워서 자심감을, 외국 생활의 힘듬을 풀고 다시 용기를 얻으라는 일본어교실
일본어교실은 우리 둘째와 막내의 따뜻한 어린시절의 모토
어디에선가 읽었는데 미국에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가 아이를 꼭 껴안아주는 아르바이트가 있다고 합니다. 그 따뜻함은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어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모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말에 많이 공감을 했습니다.
그런에 외국에서 자라야 하는 아이들은 부모 이외에는 무조건 안아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이곳 일본어교실에 처음 갔을 때는 혜나가3살, 건이가 1살쯤 이었습니다. 엄마가 공부하는 테이블 옆에 매트를 깔아놓고 보육담당자 2, 3명이 아이들을 돌봐주는 형태입니다. 여러나라 아이들 2~5명이 자유롭게 장난감, 색종이, 동화책으로 놀고요. 유치원 교사 경험자도 있어 아이들 마음에 쏙쏙들게 잘 놀아주더군요. 옆에 앉혀놓고 읽어주는 동화책의 실감도가 어디 제 일본어읽기에 비교가 되겠습니까? 2-3살배기에 중요한 동요까지 무릎에 앉혀놓고 따뜻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데 왠지 안심감에 코끝이 찡하더군요. 외국생활에서 절대로 부모는 주기 힘든 그 나라의 실감나는 동화 읽기와 동요 부르기를 따뜻하게 느끼게 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언제가 막내 건이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들이 고마운 사람에게 그림엽서 보내기를 하는데 건이는 어떻게 할까요? 라고. 순간 고민이 되더군요. 여기 할머니들은 아이에게 편지 한장 오면 엄청 기뻐하며 답장에 선물까지 꼭 챙겨서 보내거든요. 뜬끔없이 보내도 되고, 건이에게 그 기쁨을 챙겨주실 수 있는 주변사람, 일본어교실 선생님밖에 없더군요. 전화를 드렸더니 자기를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좋아하시며 답장에 과자선물까지 보내줘서 건이도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었어요.
아이들에게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일본어교실
일본어교실은 나의 성장을 돕다, 가족의 성장을 돕다
처음에는 일본어가 빨리 늘기를 바라며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의 맞춤식열성 지도에 힘입어 일본어능력시험 2급과 1급에 모두 합격했습니다. 그 자격증은 내 자신이 뿌듯하고 주변인에게 성실함을 인정받는 자격증임은 분명하나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감하고는 아직 거리가 있었습니다. 일본어교실에 2년쯤 다녔더니 폐강식의 건배사 ‘간빠이’를 해주면 좋겠다 해서 간빠이 딱 세자로 공식석상에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그 후 3년차쯤 뒷풀이 사회를 일본어선생님과 공동으로, 학생들과 일본 동화책 읽기를 기획하며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 쯤 3학년이던 큰딸의 선생님이 (사회 = 세계의 친구들) 코너에서 한국이야기 특강을 부탁했습니다. 일본어 교실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더니 자기가 바라는 학생들의 성장모습이라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 말과 응원에 자신감까지 올라올 때여서 발음과 발표법을 특별지도 받아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 이후 혜린이 엄마라고 친하게 인사하는 아이들과 이웃들이 몇배나 늘었고, 그 옆에서 뿌듯해하는 혜린이의 미소를 보았습니다.
일본 동화책읽기. 엄마의 성장은 곧 가족의 성장
그리고 5년쯤 됐을 때 이루마시에서 (아이키우기 가이드북)을 5개 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있었을 때도 일본어 선생님의 추천으로 한국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성장에 저도 기뻤지만, 시청의 번역일을 담당하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이의 마음에 더 기뻤습니다. 그리고 1년쯤 후에 우리 옆 시의 큰 행사의 방문한 경기도와 오산시 공무원 통역을 (물론 일본어 선생님 추천으로) 남편이 2박3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부모의 또다른 모습은 아이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듯 했고, 그때 한동안 큰딸은 미래의 직업이 번역 통역사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부탁했습니다.
아이들의 성장에는 그만큼 축하할 일도 많고 격려받을 일도 많더군요. 생일은 물론이고 입학, 졸업, 설날, 상을 받아오거나 병원에 입원했을때요. 그런데 외국에 살다보니 한국의 가족들과 큰일이 아닌 이상 서로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 되더군요. 요즘은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아이들 졸업과 입학은 가족의 큰 경사로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여서 축하식사를 합니다. 아이들이 입학과 졸업을 했는데 우리 가족만의 조용한 축하, 어렵게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옆테이블마다 대가족의 축하식사가 언제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가족들과 제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대학생 조카들이 가족카카톡 방을 만든게 있어서 거기에 아이들의 성장사진과 생일, 애경사를 자주 알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나 이모, 고모, 조카들에게 아이들 선물로 한국과자 예쁜 속옷 예쁜 학용품 등을 축하선물로 부탁했습니다. 저도 일본과자나 젤리를 더 자주 보냈습니다. 아이들은 어려서는 한국에서 오는 선물박스를 참 좋아했지만 중학생쯤 부터는 한국에서 자기를 응원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그 든든함을 느끼는 듯합니다. 언제가 스포츠를 하는 중학생 딸에게 제 친구가 홍삼을 보내며 자랑스러운 이혜린의 전용 스폰서라고 써있는 글을 보고 혜린이가 자기가 국가대표같다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하는데 참 뿌듯했습니다.
중학교 졸업식에서 받아온 축하선물. 같이 축하할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자주 보냈던 과자와 젤리. 보내는 기쁨도 컸습니다.
외국에서 가족끼리의 생활은 좋은 점도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2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아이들의 능력은 외국생활이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겠죠. 그리고 두 개의 문화를 접하고 살아서인지 고등학생이 된 딸을 보니 보는 시선이 저하고는 달리 넓은 것 같습니다. 일본어나 일본문화의 눈높이가 부모나 중고등학생 자녀나 비슷해서 권위적이지 않고 묻고 상의하는 분위기도 자연스러워서 좋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 좌충우돌의 가장 정점이었던 초등학교를 셋이 모두 졸업하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부모의 역할이나 그늘이 없이도 밝고 씩씩하게 잘 생활하고 있어 많이 편안합니다. 제 눈에는 부모의 상황을 이해하듯 공부도 곧잘 하고 책임감도 강하고 속도 깊어 보입니다. 참 고맙습니다. 이곳이 낮설었던 우리였지만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이 이루어진다는 10살까지는 되도록 따뜻한 추억이 쌓이도록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 노력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갖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힘들기도 많이 했지만 아이들에게 꼭 필요할 때 많이 노력하길 잘 했다고 서로를 토닥입니다.
편안하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은 고3인 첫째가 일본에서 유치원 생활했던 기억이 나네요, 앞으로도 항상 좋은 일 많으시길 기원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약 16년 전에 한일월드컵 직후 북해도로 도일하여 약 8년간 생활했었답니다. 북해도는 특히 한국 분들이 매우 적었던 기억이~ 저도 지금은 무서븐 중2 딸아이가 유치원 다니던 때가 소록소록 떠오르네요~^^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