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미학
2006-06-07
박정극 : hopema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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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중요한 일부분 – 커피
매일 아침 회사에 출근해서 연구실 문을 열었을 때 향긋한 커피 냄새를 맡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날 하루를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게 시작한다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업무를 시작할 것이다. 흑색의 음료인 커피는 그 맛과 향으로 아침의 시작은 물론 여러 가지 상황에서 즐거움을 준다. 실험을 하다가 결과가 잘 나오지 않거나 많은 연구 업무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바람 쐬러 나가는 연구원의 손엔 거의 대부분 커피 또는 담배 혹은 두 가지 모두가 들려져 있다. 연구 방향과 실험 결과에 대한 논의(discussion)에도 또한 커피는 항상 빠지지 않는다. 늦은 실험이나 작업에 잠이 오는 연구원의 잠을 쫓는 약이 또한 커피이다. 그리고 대학원 실험실 인원 모두가 식사 후에는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커피 내기를 하곤 했는데 한 잔에 고작 백 원 밖에 하지 않았지만 커피 내기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필자가 커피를 처음 마신 것은 고등학교 때이다. 학교에서 선생님 몰래 블랙커피를 잠을 쫓는 수단으로 몇 번 마셔 봤는데 잠이 안 오게 하는 약 같이 먹었을 뿐 쓴 맛의 커피는 별로 매력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어서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경우 어김없이 커피숍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대학원 이후에는 커피는 더욱 친숙한 음료가 되어 버렸다. 어릴 때는 머리가 나빠진다고 조금 맛보는 것도 힘들었던 커피가 현재 연구원으로써 필자의 삶에서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지만 많게는 하루에 일곱 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 같고, 한약을 먹거나 특별히 몸이 좋지 않는 한 적어도 세 잔은 마시는 것 같다. 필자뿐 아니라 주위를 돌러 보면 대부분 회사원의 생활에서 커피가 없다는 것은 상상하기 조차 힘든 것 같다.
커피와 건강
신기한 것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커피를 많이 마시면서도 커피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데 상당부분 기여하고 있다고 걱정을 한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걱정으로 잠시 망설이다가도 커피 자판기를 외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커피에 심각하게 중독된 것일까?
커피에 대해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 카페인 중독과 커피로 인한 속 쓰림이다. 실제 커피의 카페인은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는 작용을 하여 ‘스타크래프트’에서 마린의 스팀 팩을 쓰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하는 반면 많이 마시는 경우에는 카페인의 독성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몸무게가 60kg인 사람을 기준으로 카페인의 치사량은 8g 이상인데 커피를 통해 8g 카페인을 섭취하려면 약 70잔에서 200잔의 커피를 마셔야 하고 또 계속 커피를 마신다고 해도 체내 카페인의 반감기는 5~6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임산부와 아동들에 대한 카페인의 독성은 일반 성인들에 대한 것보다 강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또 카페인은 체내에서 칼슘과 철분의 흡수성을 저하시켜 수년간 꾸준히 많은 양을 섭취할 경우 골다공증을 유발할 수 있다고도 한다. 한편 카페인은 위산 분비를 촉진시키는데 위산 분비의 촉진이 바로 빈속에 커피를 마시는 경우 속 쓰림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이다.
커피가 몸에 좋지 않은 영향만 끼치는 것도 아니고 아주 많은 양을 마시지만 않는다면 괜찮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걱정이 된다고 커피를 아예 안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몸에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여 커피를 즐기기 위해서는 먼저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인스턴트 커피를 치우고 원두커피를 마셔야 한다. 커피는 크게 나누면 품종에 따라 아라비카 종과 로부스타 종으로 나뉠 수 있다. 아라비카 종은 원산지가 에티오피아이며 평균 기온이 20℃인 해발 1800m 이상인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아라비카 종은 상대적으로 품질이 좋으나 기후, 토양, 질병에 상당히 민감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반면 로부스타 종은 아프리카 콩고가 원산지이며 기생충과 질병에 대한 내성이 강하다. 기생충과 질병에 대한 내성이 강하기 때문에 쓴맛이 강하고 카페인 함량이 아라비카 종의 3배가 넘으며 인스턴트 커피의 주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인스턴트 커피의 주 원료가 되는 로부스타 종은 쓴맛이 강하고 카페인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커피에 대한 걱정을 불러 일으키지만 조금의 수고만 더하면 몸에 더 좋은(?) 원두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그런 걱정들을 없앨 수 있다. 원두 커피를 마시면 또한 불필요한 설탕과 분말 프림의 섭취 또한 줄일 수 있으니 몸에 미치는 영향을 더욱 줄일 수 있게 된다. 또 하나의 방법은 프림 대신 커피에 우유를 첨가하여 마시는 것이다. 우유는 위벽을 감싸서 보호하는 역할도 하고 우유에 함유된 풍부한 칼슘이 칼슘의 흡수율 저하를 상쇄시켜 주기 때문이다.
커피의 맛과 향 그리고 사람
커피의 향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절로 눈을 감게 하는 진한 헤이즐넛 커피이다. 한 때 헤이즐넛 커피가 크게 유행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요즘도 연구실에서 커피를 추출하다 보면 헤이즐넛 커피는 없냐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 헤이즐넛 커피로 대표되는 향 커피는 최상급이 아닌 원두에 우리말로는 개암나무인 헤이즐넛 등의 추출물을 섞거나 향을 주입한 것이다. 커피의 향이 사람의 코를 통해 즐거움을 준다면 미각을 통해 즐거움을 주는 커피의 맛은 단맛, 쓴맛, 신맛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에 맛이라기 보다는 촉각에 가까운 듯한 감찰 맛이 더해진다. 세 가지 맛과 감칠맛의 배합은 기후와 토양에 따라 다르므로 커피의 종류는 보통 산지 이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콜롬비아 커피는 단맛이 강하고 신맛은 모카나 킬리만자로 커피가 강하다. 쓴맛은 자바 로부스타가 강하고 감칠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콜롬비아나 과테말라, 킬리만자로 커피를 추천한다. 헤이즐넛 커피만큼은 아니지만 콜롬비아 커피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단맛과 감칠맛이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커피 원두: 자주 애용하는 단골집(왼쪽)에서 최근 구입한 탄자니아 커피와 에티오피아 산 이가체프를 블렌딩한 원두 사진. 연구단지 주변 애호가들은 주로 탄자니아 커피를 찾는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의 개성은 너무나도 독특하여 신기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의 이런 다양한 면을 분류하는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혈액형이다. 혈액형이 O형인 나는 이상하게도 A형의 특징들을 주로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혈액형으로 사람 성격을 짐작하는 것은 상당부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좀 더 깊이 그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할 때 단순하게 A, B, O, AB의 네 가지 혈액형으로 사람을 구분 짓는 것은 쉽지 않은데 커피의 맛도 이와 같은 것 같다. 커피 산지에 따라 일단 많은 종류로 나뉘지만 산지의 생두가 최종 커피의 맛을 100% 결정짓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원두로 커피를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 맛은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좋은 생두를 구한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입 속으로 들어가는 커피는 후천적 인자인 생두의 배전(로스팅, roasting), 보관, 알맞은 굵기로의 분쇄, 추출법, 물맛과 무엇보다 과정을 담당하는 사람의 정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좋은 맛이 날 수 있는 것이다.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얻게 되는 어떤 장, 단점들을 어떻게 잘 관리하고 극복하냐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훌륭한 ‘마담’ 되기
맛과 향이 뛰어나고 카페인의 함량 또한 낮으며 불필요한 설탕과 분말 프림의 섭취를 줄일 수 있다는 매력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준비하는데 시간과 정성이 많이 소요되는 원두 커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을 사무실이나 연구실에서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처음에 마음을 먹고 시작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필자는 커피를 좋아하던 차에 대학원과 지금 회사의 연구실에서 원두 커피를 담당하는 ‘마담’ 역할을 하고 있다. 석사 시절 군 생활을 할 때 사용하던 커피 메이커를 실험실에 가져다 놓고 고향인 대구의 잘 알려진 커피숍에서 질 좋은 커피를 공수하여 ‘마담’으로서의 첫 발을 내디딜 때는 좋았으나 수업과 실험 등의 업무량이 많아지면서 지속적으로 꾸준히 관리하는 것은 점점 어려운 일이 됐다. 급기야 원두 찌거기를 제 때 버리지 않아 곰팡이가 필 때도 있었고 커피 메이커 주변이 항상 청결하지 못했는데도 부족한 ‘마담’을 탓하지 않고 맛있게 커피를 마셔 준 당시의 실험실 원들이 참 고마웠다. 그 때의 아쉬움을 생각해서 현재 회사에서는 좀 더 훌륭한 ‘마담’으로 거듭나고자 노력 중이다. 분쇄 전의 원두를 커피를 추출하기 전 필요한 만큼만 분쇄하여 신선도를 유지하려 하고 커피 메이커 본체와 주변을 하루에 한 번 이상 청소하여 깨끗하게 하려고 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이를 꾸준히 지키면서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원두를 매번 갈 때마다 멀리 떨어진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꺼냈다가 다시 보관하는 것이 귀찮을 때도 있고 회식이나 야근으로 피곤하면 아침에 남들보다 조금 일찍 나와 커피를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이 약해질 때도 있다 – 다행히도 같이 근무하는 선임자 한 분이 늦게 나갈 때면 대신해서 커피를 추출하여 주시는 덕분에 부담이 많이 줄어 들었다. - 커피 메이커 주변을 아무리 청소해도 각설탕 포장지가 탁자 위에 막 버려져 있거나 커피를 탁자에 흘렸는데도 닦지 않고 그대로 흥건하게 내버려 둔 것을 보면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커피 원두가 다 떨어졌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단골 가게로 원두를 구입하러 가는 것도 바쁠 때는 귀찮은 일이 된다. 이렇게 귀찮은 점들을 쭉 나열해 놓고 보니까 내 자신이 무척 게으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서른 살에 외국 유학을 가서 애니메이션을 처음으로 공부하고 지금은 엔씨소프트에서 근무하고 있는, 존경하는 형이 한 명 있다. 그 형은 출근하면 가장 먼저 휴게실을 청소하고 재떨이를 비운다고 한다. 자기는 담배도 피지 않고 나이도 주변 동료들에 비하면 적지 않지만 그냥 자기가 주위 동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하다가 매일 늦게까지 야근한 사람들이 어지럽힌 휴게
실을 아침마다 청소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했다.
보다 신선하고 맛있는 커피를 구입하고 관리하며 알맞은 굵기로 분쇄한 뒤 깨끗한 커피 메이커로 맛있는 커피와 향을 추출하는 일을 앞으로도 처음 시작할 때 마음으로 계속 잘 해야겠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매일 아침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향긋한 커피 내음으로 주변에 함께 일하는 선배, 동료들을 조금이나마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매일 아침마다 잠시 짬을 내는 것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쁜 것이기 때문이다.
커피의 미학
한 잔의 커피에서 맛볼 수 있는 인생의 쓴맛, 단맛, 신맛과 은은한 향기 그리고 그 속에 녹아 있는 따뜻하고 세심한 정성이 모두 하나가 되어 커피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격려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주위의 동료들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하는 것은 어떨까?
저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셨네요. 한가지 알려드리면, 원두를 보관하실때 냉장고에 넣으면 안좋다고 합니다. 오히려 상온보관하셔야 맛과 신선도가 유지된다고 하니 참고하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