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달밤
2006-12-05
박재범 : ev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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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달밤” 하면 생각나는게 몇가지 있습니다. 가수 현인이 노래한 “신라의 달밤”, 이성재, 차승원, 김혜수가 주연한 영화 “신라의 달밤”, 그리고 “경주를 사람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매년 주최하는 행사명이기도 하지요. 역사와 문화의 도시 경주 일원을 달밤에 함께 걸으면서 천년역사속의 신라를 함께 느끼고 걷기의 생활화와 극기체험을 통하여 강인한 체력 단력과 호연지기를 키우고자 한다는 의도 아래 5년전부터 매년 한차례씩 개최되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4일, 토요일 저녁 신라 유적지를 답사하는 신라의 달밤이라는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이 행사가 올해 처음이었습니다.
오후 8시 경주 황성공원을 출발해 165리, 즉 66㎞를 걷게 되는 여정입니다. 황성공원을 출발하여, 보문호와 덕동 저수지를 지나고 추령재를 넘어서 토함산을 올라가서 석굴암에서 일출을 맞이하고, 불국사 경내를 지나 통일전, 경주박물관, 안압지, 첨성대, 천마총 등을 거쳐서 황성공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코스입니다.
삼국유사에 근거해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기 위해 행차한 길을 여러 문헌과 고지도를 갖고 유추해 거리를 165리로 잡았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크고 작은 행군도 여러차례 했었구, 100km 행군도 두차례나 했었기에 66km는 만만하게 봤습니다. 대충 준비해서 행사장을 갔었는데....벌써 수천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기사를 보니 2천 5백여명이라 하더군요. 완주는 천명 정도…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늘 차를 타고 다니다가 간만에 걸어본다는 생각에 말이지요. 때마침 떠오른 휘엉청 둥근 보름달 아래로 가을 억새밭을 지나고, 물안개 피어오르던 보문호 주변을 돌아, 달빛이 은근히 비쳐주는 산속길을 걸어, 먼데서 개짖는 소리가 들리던 시골 마을을 지나, 쏴~소리를 내며 흐르는 강변을 따라...
새벽1시 넘어서 동해 감포로 가는 추령재에서 라면을 먹은후 잠시 휴식을 한 후에 벌써부터 무거워진 다리를 들어 출발을 하였습니다. 추령재 계곡을 터벅 터벅 내려가는데,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부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소나기 내리는 소리가 계곡을 울리는데,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소리였습니다.
얼마간 걸었을까요? 6시간쯤 걸으니 팻말이 하나 보이더군요. 30km~! 아~ 이제 온만큼 걸으면 되는것인가? 벌써 몸은 지쳐오구, 졸립구, 다리는 퍽퍽하고… 이제 30km 남았네 가 아니라, 저는 아직도 30km나 남았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직진을 하면 동해바다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가면 토함산으롤 올라가는 장항 삼거리에 도달했습니다. 토함산 석굴암으로 올라가는데 꼬박 4시간이 넘게 걸리더군요. 가도 가도 끝이 없구, 구비 구비 도로를 따라서 석굴암으로 가는 길이 왜 그리도 길고 지리하던지. 깜깜한 산중에 난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불빛조차 보이지 않구, 몸은 힘들어서 이제는 화가 나더군요. 내가 도대체 왜 이런짓을 사서 해야하는가~!
66km 구간 중간 중간에 확인 도장을 받아야 했습니다. 총 5개의 도장을 받아야 하는데, 30km 넘게 왔건만 확인증에 찍힌 도장은 달랑 두 개~! 중도 포기자를 위해서 계속 운행되고 있던 회송자 버스. 손만 들면 세워주고 올라타면 되련만, 멀리서 버스 소리만 들려도 손을 들까 말까 망설여졌습니다.
6시경에 석굴암에 도착해서 국밥으로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삼대가 덕을 쌓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일출에도 관심도 없구, 불국사에서 타종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더군요. 석굴암에서 다시 불국사로 내려와서 황금들녘을 가로질러 통일전으로 가는데...이때는 밤은 벌써 꼬박 지새운 상태이고 지쳐서 발은 무겁고, 다리의 근육은 땡겨오고, 발바닥에서는 물집들이 생겨서 걸을때 마다 가시밭길이고... 얼굴은 구겨질대로 구겨져서 곳곳의 자원봉사자들이 힘내라고 응원을 해줘도 소용도 없더군요. 안압지, 반월성, 계림숲, 석빙고, 첨성대… 신라의 유적지 바로 옆을 지나가도 힘든 사람 뺑뺑 돌게 코스를 잡아도 놨군 하는 생각에 화도 났습니다.
마지막 구간의 도장을 받구선, 도착지까지 3km 남았다고 하는데, 아주 다 팽겨치고 싶었습니다. 지나가는 택시 잡아서 저기까지만 갈까 하는 맘도 굴뚝이구 말이죠. 정말로 택시 하나 잡을뻔 했습니다. 지나간 택시를 보구선 아예 택시 잡을 맘으로 뒤를 돌아보면서 걷기도 했습니다. 내 앞으로 다시는 이런 미친짓 절대 안하겠다고 맹세도 하구말이죠.
드디어, 황성공원 실내육관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내가 해냈구나~! 이런 감동적인 맘이 들기는커녕, 어디가서 사우나 좀 해야겠다 하는 맘이 간절했습니다. 완주증과 완주메달을 손에 쥘때까지도 말입니다. 장장 15시간을 걸어서 양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지만, 다리 통증이 사라지기도 전에 내년에도 또 참가할까 하는 맘이 생기더군요.
굳이 천년전의 신라인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불과 백년전만 하더라도 걷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서 일부러 걷기, 조깅 등 운동을 한다고 하지만, 그 옛날 사람들은 건강이 아닌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몇십리가 되는 길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다녔습니다. 내가 165리를 걸으면서 세상 모든 인고를 느끼듯 했었건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겁니다. 극기훈련, 행군등의 행사를 통해서야 인내력과 극기심을 길러야 하는 현대인들… 걸으면서 잠시 해본 생각이었습니다.
저녁간식을 먹었던 추령재의 백년찻집에 이런글이 써 있었더군요.
“서산에 해가 진다
해가 큰소리로 말하더라
나 진다! 구차하게 살지 말아라!“
멋지네요 찻집 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