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에서(1)
2007-05-04
원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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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세이와 아오이가 수없이 지나갔음직한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은 13세기부터,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피렌체의 중심이다. 피렌체의 역사는 항상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며, 지금도 중요한 행사나 축제, 시위마저도 모두 이 광장에서 행해진다고 한다. 이 광장의 중심인 베키오 궁Palazzo Vecchio은 13세기에 지어져 피렌체의 중앙 관청으로 쓰이다가, 16세기부터는 메디치가의 궁전으로 사용되면서 시뇨리아 궁Palazzo della Signoria으로 불렸는데, 피렌체를 통치한 공작 코시모 1세Duke Cosimo I (1519-1574: 재위 1537-1574)가 아르노 강 건너 피티 궁Palazzo Pitti으로 이사하면서 오래된 궁이라는 뜻의 베키오 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2006년 여름, 광장 앞 카페에 앉아 베키오 궁 주위에 있는 3개의 조각상들을 본다.
<넵튠의 분수>
코시모 1세는 메디치가를 일으킨 코시모 일 베키오 및 권세와 부, 피렌체 문화의 전성기를 꽃피운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전례를 따라 메디치가가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로 보여 지기를 원해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고 작품 제작을 의뢰하였다고 한다.
1565년 12월 18일 공작 코시모 1세의 후계자인 아들, 프란체스코 1세Francesco I de' Medici(1541 – 1587: 재위1574~1587)는 합스부르크가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의 막내딸 조안나Johanna와 결혼식을 가졌다.
코시모 1세는 예술의 후원자답게 대단한 합스부르크가의 며느리를 맞이하는 것을 기념하여 아마나티Bartolomeo Ammannati로 하여금 베키오 궁의 좌측에 바다의 신인 <넵튠의 분수Fountain of Neptune>를 제작하도록 의뢰하였다.
실제 이 작업은 나이가 많은 반디넬리Baccio Bandinelli에게 의뢰 되었는데, 이미 나이가 많았던 반디넬리는 설계만 간신히 끝내고, 대리석을 만져보지도 못한 채 죽었다. 아마나티는 지암볼로냐Giambologna와 같이 분수를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이 분수는 1565년에 완성되었다.
넵튠의 얼굴은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 마치 피렌체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듯 당시 피렌체의 지배자인 코시모 1세의 얼굴과 닮았다고 한다. 이 조각성이 완성되었을 때 피렌체 사람들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미켈란젤로마저 아마나티가 이렇게 훌륭한 대리석을 망쳤다고 한탄했었다고.
그래서 그런지, 이 분수 조각상들은 많은 수난을 당했다. 16세기까지는 빨래터로 사용되었고, 1580년 1월 25일에는 파괴당하기도 했고, 분수 주위의 장식들인 사티로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인 괴물들)는 1830년에 도난을 당하기도 했었다.
넵튠 조각상은 19세기에 복제되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고, 원본은 국립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2005년 8월 4일에는 세 사람의 파괴자들이 분수에 올라가서, 넵튠의 오른 팔과 넵튠의 삼지창을 파괴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파괴 현장은 비밀 카메라에 기록되었다. 요즘은 어딜 가나 카메라가 있으니...
시뇨리아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이고, 새들도 모이고, 비록 복제품이라고 해도 흐르는 세월과 환경오염의 위험을 받고 있었다. 최대한의 예술성을 유지하면서 본래의 자리에 서 있기 위해 넵튠은 머리에 관과 같은 것을 쓰고 있는데, 이는 전기 장치로 수많은 비둘기 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다비드>
눈을 오른 쪽으로 조금 만 돌리면, 시청 입구에 두 개의 커다란 조각상이 있다. 왼쪽에 있는 것이 로마에서 <피에타 상> 제작을 마치고 돌아온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에서 4년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한 대리석 다비드 상이다.
이 다비드상은 헤라클레스 같은 건장한 다비드가 돌팔매 끈을 왼편 어깨에 메고 골리앗이 다가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중세 예술의 특징이었던, 금욕적이고 영적인 성격을 벗어나 고대 예술의 인간적인 모습과 육체적인 묘사로 회귀하는 르네상스 예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돌을 쥐고 있는 손등의 살아 있는 듯한 핏줄까지 표현되어 있고, 얼굴에는 나라를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 외에도 실제 골리앗 앞에 서서 밀려오는 인간적인 두려움마저도 표현되어 있다.
다비드상은 원래 피렌체 성당을 위해 조각한 것이었으나 크기나 형태가 성당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당당했다. 그래서 1504년 1월 25일, 다비드 상의 위치를 정하기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홉 곳의 후보지 중에 시청 앞 현관과 그 옆에 있는 로지아 회랑Loggia dei Lanzi의 중앙 아치의 두 곳으로 압축되었다. 정치적 목적에 적합한 시청 앞 현관에 놓는가와 비록 정치적인 이미지는 떨어지지만 미술품 보존에 있어 안전한 장소인 지붕이 있는 로지아 회랑에 놓는 가에 대한 선택이었다. 당시 피렌체의 상황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기의 시기였다. 다비드상의 주문 목적이 공화정을 상징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나라를 구한 다비드가 피렌체인의 어려움을 구해주기를 기원하면서, 시청 현관 앞에 놓이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진품은 1873년까지 이곳에 있다가 안전상의 이유로 아카데미아Galleria dell' Academia 미술관으로 옮겨 갔고, 현재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역시 1504년 완성된 이래 수많은 훼손을 겪어왔다. 1527년 폭동 당시에는 의자에 맞아 왼쪽 팔이 세 조각났고, 1991년에는 한 예술가가 망치를 집어던져 발가락이 부서지기도 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색이 바라게 되어 다비드상의 전면적인 세척작업이 1843년에 이루어졌었는데, 당시 세척을 담당한 아리스토데모 코스톨리라는 복원가는 독한 염산을 세척액으로 사용할 만큼 문화재 보존에 무지함을 드러냈다.
이렇게 수난을 겪은 다비드상은 과거의 멋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노후화되어서, 이탈리아 정부가 2003년 새로운 보존 처리 방침을 밝히자 전문가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다비드의 상태에 대해 수개월간의 조사를 한 후 이탈리아 정부는 다비드 상에 묻어 있는 황산칼슘(석고· CaSO4)들이 가장 큰 이물질이라고 파악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증류수를 뿌린 습포제를 이용, 이물질을 제거하는 동시에 구멍의 먼지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를 비롯, 미국·유럽의 언론들은 물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비드상 표면을 먼지와 같은 이물질이 흡착되는 것을 막는 기름기까지 제거한다고 이 방식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또 습포제를 이용한 압착법이 구멍의 때를 빼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논란 속에 다비드상 복원을 담당하던 기술자는 솔·걸레·지우개 등을 이용한 전통적인 세척 방법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임하기도 했다.
- 62호에 계속됩니다.
메디치가,합스부루쿠가문 이 모두 유럽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들이죠!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