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신이 된 관우(關羽)“ - 관림(關林) 관광기(2)

의문(依門)을 지나면 관림의 중심건물로 배전(拜殿), 평안전(平安殿)이라고도 부르는 대전(大殿)이 나온다. 의문과 대전을 연결하는 통로 양쪽 돌기둥 위에는 사자를 조각해 놓았다. 석사자가 늘어서 있다고 이 길을 '관림의 돌사자길'(관림석사어도; 關林石獅御道)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관제상“
▲ 대전(大殿)에 봉인된 관제상. 황제의 모습이다.

관림은 중국고대 건축물의 특징을 대표적인 구조물이다. 고대 중국의 건축양식은 남쪽에 정문을 두고 북쪽으로 주요 건물을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관림 또한 무루(舞樓), 정문, 의문(依門), 용도(甬道), 대전(大殿), 이전(二殿), 삼전(三殿), 석방(石坊)과 팔각정(八角亭)이 중심선위에 있고 관우의 능인 관총이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우리가 간 길도 정문, 의문, 대전, 이전, 삼전을 거쳐 관총에서 끝을 맺는데 모두 일직선으로 움직인 것이다.

관림의 중심건물은 관우를 모신 대전(大殿)이다. 대전은 높이 26m의 궁전식 건물로 유리기와를 이고 있다. 대전에는 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 여포(呂布, Lvbu)와 세번 싸운 이야기 등 관우의 일대기가 조각과 벽화로 새겨져 있다. 대전 중앙에 봉인된 관우좌상은 높이가 6m에 이른다. 이전(二殿)과 삼전(三殿)에 모신 관우상이 장수의 복장을 하고 있는 반면 대전의 관우상은 용으로 조각된 의자에 몸에 용포(龍袍)를 입고 머리에 왕관을 쓴 신성하고 장엄한 제왕(帝王)의 모습을 하고 앉아있다.

용상에 앉아 있는 이 관우좌상(關羽坐像)은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버들가지처럼 늘어진 장식을 유(旒)라고 한다. 실에 구슬을 꿰어 맨 유는 그 갯수로 지위를 나타내는 것인 모양이다. 천자는 12개를 달았고, 제후는 9개, 상대부는 7개, 하대부는 5개를 달 수 있었다고 한다. 관우도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있으니 확실히 천자의 지위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신으로 모시기 시작한 가장 큰 역사적인 사건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정변이라고 한다. 1399년에 주체가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는데, 그가 바로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다. 영락제는 '관우의 영험한 도움을 얻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고 했는데 이는 '하늘의 뜻'이었음을 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황제가 관우의 도움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당시 민중들이 이미 관우를 신으로 모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황제조차도 관우를 신으로 인정해버린 것이 이미 600년도 전의 일이다.

“청룡언월도“
▲ 대전(大殿) 앞에 있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관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바로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다. 대전 바로 앞에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청룡언월도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무게는 82근(50kg), 길이는 255cm라고 한다. 정말 거대하다. 안내자의 말로는 말에서 싸울 때 쓰는 무기이기 때문에 이렇게 무겁고 길어도 충분히 사용가능했다고 한다. 게다가 키가 9척(약207cm)이었다고 하니 충분히 휘두를만도 했을 것 같다 (최홍만이 이 정도의 무기를 휘두른다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관우의 실제 키는 8척(180cm) 정도이고, 한나라 당시 도량으로 한 근은 223g이었기 때문에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18kg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전장에서 수도 없이 휘둘러야 하는 무기의 무게로는 너무 무겁다. 장식용이라면 모를까...

실제로 청룡언월도는 한나라 때에는 없었던 무기다. 또한 월도나 언월도라는 칼은 북방민족의 무기였으며 한족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송나라 때부터라고 한다. 이전에는 두터운 갑옷이 없었기 때문에 언월도 같은 무거운 무기가 필요없었으나 갑옷의 발달로 이를 공격할 수 있는 중병들이 송나라 때부터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관우에 대한 숭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것이 송나라 때부터라는 것이다. 아마도 관우를 주인공으로 하는 경극 같은 곳에서 청룡언월도를 관우의 무기로 설정하였고 이것이 후대에 까지 이어져서 명나라 때의 나관중의《삼국지연의》에까지 관우의 무기로 청룡언월도가 잘못 계승된 것은 아닐까?

삼국지 정사에는 관우의 무기가 손잡이가 있는 검이었다고 한다. 1m80의 거구(당시에는 큰 키였으리라)가 말을 타고 칼을 휘둘렀다면 이 또한 매우 용맹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관우는 '일만 명을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용맹스런 장수였다.

“대전
▲ 대전(大殿) 벽화 - 관우의 출정도일까?

두 자루 검을 든 장수는 장비로 보이고 이 장수의 뒷쪽으로 부채를 든 이는 제갈량(제갈공명)이 아닐까 싶다.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달고 적토마를 탄 채 청룡언월도를 든 이는 당연히 관우다. 아마도 적벽대전으로 출전하는 유비의 군대를 묘사한 벽화가 아닌가 싶다. (삼국지 정사에 의하면 적벽대전도 실제로는 허구이고 제갈량은 당시 전투에서 외교관으로만 활동했으며, 조조가 군대를 돌린 이유는 역병(전염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까지 이어지던 설화와 나관중의 미화로 적벽대전의 전설이 만들어진 것 같다.)

삼국지연의에는 관우와 최후를 같이한 말이 적토마라고 하는데 여포의 말이었던 적토마를 관우가 차지할 때 적토마의 나이가 이미 10살을 넘어 한창 때를 지난 때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20년 후 관우가 죽을 때까지 적토마가 살아있었을 수는 없을 거라고 한다. 관우의 충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주인을 따라 굶어죽었다는 적토마의 생명을 관우 최후의 날까지 연장시킨 것은 민간에 내려오던 설화를 이은 나관중의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정사에는 여포가 적토마라는 이름을 가진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밖에 없다고 한다.)

하나 더... 덧붙여보자. 삼국지 정사에 의하면 관우, 유비, 장비가 만날 당시의 나이는 각각 25살, 24살, 22살로 관우가 가장 연장자였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도원결의가 없는데 다만 서로 친형제처럼 가까왔다고 언급되어 있다. 만약 주군과 장수로서가 아니라 도원결의로 형제의 의가 맺어졌다면 관우가 큰형이 되었을 것 같다.


▲ 이전(二殿) 관우좌상. 왼쪽은 주창(周倉), 오른쪽은 관평(關平)

9척(약207cm)에 이르는 큰 키, 2자 길이의 긴 수염, 홍시처럼 붉은 얼굴,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되는 관우상이 이전(二殿)에 봉인되어 있다. 관우의 왼쪽으로 주창(周倉, Zhouchang)이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고 왼쪽으로는 관평(關平; Guanping, 관우의 큰 아들)이 관우의 직인(도장)을 들고 있다. 주창이 언월도를 들고 관평이 보좌하는 이런 모습이 전형적인 관제묘의 관우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의 지원으로 서울에 관제묘를 지었는데 주창과 관평이 관우를 보좌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관광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이전(二殿)의 관우상이 바라보는 곳은 자신의 몸이 있는 호북성 당양이라고 한다. (관우는 손권에 의해 호북성 당양(當陽, Dangyang)에서 효수되었다. 당양에는 관우의 몸을 묻은 관능(關陵)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전의 관우상은 화난 표정을 하고 있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손권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일까?


▲ 삼전(三殿) 왼쪽편의 관우상: 야관춘추(夜觀春秋)

이전(二殿)을 지나 삼전(三殿)에 이르면 누워서 쉬는 관우상이 모셔져 있다. 그 왼쪽으로는 책을 읽는 관우상이 있는 데 야관춘추(夜觀春秋)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관우는 문인으로도 유명한데 그 모습을 밤에도 춘추를 읽는 조각으로 표현한 모양이다. (책을 보면서 1800년 전에도 저런 좋은 재질의 책이 있었나 하고 속으로 웃었었다.)

““
▲ 관우의 머리무덤. 묘위로 나무를 심은 것이 특이하다.

손권이 관우를 사로잡아 효수한 후에 유비의 보복이 두려워 조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관우의 머리만을 조조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런 의도를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 관우를 존경했던 조조는 관우의 머리에 나무로 만든 몸을 만든 후 형왕(荊王)으로 봉하고 귀족의 예로 뤄양의 관림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위 사진에서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곳이 바로 원래의 관우 무덤이다. 웬만한 릉만큼 컸는데 우리나라 고분과 차이나는 점은 무덤에 빼곡하게 나무를 심었다는 점이다. 안내자에 따르면 사후에도 나무그늘에서 시원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중국인들의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한다. (낙양은 정말 후덥지근하다. 여름이면 중국인들이 왜 그렇게 웃통을 벗고서 사는 지 알 수 있었다. 한국과 다른 이런 환경의 차이가 문화의 차이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안내하시는 분의 설명으로 무덤이 왜 “림(林)“인지 알았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황제의 묘는 “능(陵)“, 귀족의 묘는 “총(塚)“, 백성의 묘는 “분(墳)“이라 했는데, 성인의 묘는 “림(林)“이라고 한다. 문성(文聖)인 공자의 무덤 “공림(孔林)“과 무성(武聖)인 관우의 무덤 “관림(關林)“을 함께 중국에서 “이림(二林)“으로 부른다고 한다. 무덤과 사당, 그리고 숲이 어우러지게 만든 형태를 림이라고 하는 것 같다.

관우는 촉(蜀, Shu)나라의 명장으로 자를 따서 관운장(關云長, Guanchang)으로도 불린다. 설화와 경극,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부풀림이 있었다 할지라도 관우의 일생은 충성(忠)과 의리(義), 어짐(仁), 용맹(勇)으로 쓴 대서사시이다. 역대 위정자들의 통치관에 부합하기도 한 것이었지만 그의 충의인용(忠義仁勇)의 삶은 중국, 나아가서는 유교문화권의 도덕적 모범이 되었다. 관우의 위상은 한(漢, Han)조에는 후(侯)로, 송(宋, Song)조에는 왕(王), 명(明, Ming)조와 청(淸, Qing)조에서는 제(帝)로 봉받으면서 점차 중국 민중의 마음을 지배했다.

가이드 분의 말로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유불선 삼교에서 동시에 섬기는 사람이 관우라고 한다. 도교(道敎)에서는 천존(天尊)으로, 유가(儒敎)에서는 성인(聖人)으로, 불교(佛敎)에서는 불(佛)로 봉해졌다고 한다. 한 사람의 무인이 신의 지위까지 올라간 것이다. 근대에 와서는 관우를 보호의 신 또는 수호신으로 군인이나 경찰이 섬겼으며, 현대인들은 관우를 부의 신으로 모신다고 한다. 무장이 부의 신이 되었다는 것은 관우가 이제는 온전한 신의 지위로 중국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 들어앉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관우는 왕도 아니었고 그가 모시는 왕이 천하를 통일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이순신 장군처럼 지략이 뛰어난 장수도 아니었다. 심지어 인간적인 면에서는 자존심이 강하고 교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를 평하길, “관우는 만 명을 대적할 만한 용맹한 장수이며 조조에게 보답을 하는 등 국사(國士)의 풍격이 있다. 하지만 관우의 굳세고 교만한 단점으로 결국에는 실패하였다“라고 했다. 역사적으로는 실패한 왕을 섬겼던 실패한 장수인 셈이다.

그러면 왜 그토록 중국인들은 관우를 존경하는 것일까? 왜 신으로까지 모실 정도로 숭배하게 된 것일까? 외적인 이유로는 당나라 말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천년 이상에 걸친 위정자들의 의도적인 신격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받친 관우의 역할모델은 모든 위정자들에게는 정말 매력적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굳은 심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비에 대한 변함 없는 충성과 의리, 때로는 미련해 보일 정도로 우직하고 한결 같은 관우의 일생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중국 민중에게 있어 그를 회유하려 했던 조조의 갖가지 유혹은 부처가 보리수 아래서 받은 마귀의 유혹 또는 예수가 광야에서 받았던 사탄의 유혹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러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자료

- 눌인정사로의 초대: 낙양(洛陽) 관림(關林) Ⅴ - 건물배치와 특징 http://blog.daum.net/ydoy0000/13210670
- 중국의 어제와 오늘: 공자와 어깨를 함께 한 무성 관우(關羽) - http://www.chinabang.co.kr/renwu/guanyu.htm
- 중국국제방송 관광채널: 관우(關羽)와 관림(關林) - http://korean.cri.cn/420/2006/09/18/1@73282.htm
- 박넝쿨의 중국 탐험: 관우(關羽)와 관림(關林) - http://blog.naver.com/seoil5824/10021889404
-관우 (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EA%B4%80%EC%9A%B0

덧붙이는 말

본 글과 함께 게재한 모든 사진은 필자가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모든 사진은 공익에 반하지 않는 목적이라면 어떠한 용도로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 공개, public domain).원본 사진들은 여기에서보실 수 있습니다. 빠듯한 일정이라 관광도 수박겉핥기식이어서 많은 사진을 찍지는 못했습니다.관림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와 사진을 찾고자 하시면 첫번째 참고자료를 참조하십시오. 놀라울 정도로 자세한 정보와 많은 사진들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 좋아요
손지훈(htlaz) 2024-04-28

관우 그 이름만으로도 벅찹니다.잘 읽었고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