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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관우(關羽)“ - 관림(關林) 관광기(1)

지난 8월, 중국 낙양(洛陽, Luoyang)에 개최된 학회(ALPIT-2007)를 다녀왔다. 낙양은 중국 5천년 역사의 향기가 그대로 묻어나는 도시다. 중원(中原)의 중심지인 낙양은 중국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원을 차지하는 자가 천하의 주인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조조(曺操, Caocao)와 원소(袁紹, Yuanshao)가 치열하게 싸웠던 곳이기도 하다.

빠듯한 일정중에 잠시 짬을 내어 가이드와 함께 관림(關林, Guanlin) 관광을 다녀왔다.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관제묘(關帝廟)의 원조격인 관우(關羽, Guanyu, 서기 160년~219년)의 머리무덤이 바로 뤄양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관우는 손권(孫權, Sunquan)에게 사로잡혔다가 효수당했는데 손권이 관우의 머리만 조조에게 보냈고 조조가 관우의 머리를 귀족의 예로 성대하게 장사지낸 곳이 관림(關林)이라고 한다. 삼국지(연의)의 향기가 묻어나는 곳... 사진 한장 한장을 따라 관림을 둘러보자.

관림(關林)

낙양의 남쪽에 있는 관우의 무덤.

관우는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서민 신앙의 중심이며 관제묘(關帝廟)가 도처에 있다. 삼국시대에 활약했던 촉의 유비(劉備, Liubei), 관우, 장비(張飛, Zhangfei)의 설화가 민간에 보급되기 시작한것은 당나라 말기쯤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송에서 원에 걸쳐 연극 등으로 한창 다루어지게 되자, 의인(義人) 관우의 신격화가 이루어졌다. 관우는 원래 무인이었기 때문에 지배자들도 크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官)의 측에서 신격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것은 북송말 휘종(徽宗)의 숭녕연간(嵩寧年間;12세기)부터인데 역대 조정에서 잇달아 칭호가 증정되어 청의 도광(道光) 연간에는 -1828년-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忠義神武靈祐仁勇威顯關聖大帝)라 불리기에 이르렀다.관우는 문(文)의 성인 공자와 나란히 무(武)의 성인이라 일컬어지고 있으므로,그 묘도 공자의 묘가 공림(孔林)이라 불리고 있는데 대하여 관림(關林)이라 불리고 있다. 관우는 손권에게 패하여 효수되어 그 목은 조조에게 보내어진 후, 낙양의 남쪽 교외에 장사지내어 졌다. 그 목을 매장한 무덤은 분명치 않은데 명나라 시대에 만든 관림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목을 매장한 무덤이라는 것이다. 관우가 죽은 날로 되어 있는 3일에는 이 관림 앞에 장이 선다. 이 장에는 하남성의 수만의 사람들이 모여 성황을 이룬다. (글 출처:야후)

“관림광장“관림광장
▲ 관림 정문앞 광장 전면▲ 관림 정문: 오른쪽부터 “충(忠), 의(義), 인(仁), 용(勇)“

관림광장에 도착해서 가장 놀란 점은 말 그대로 넓은 광장에 집들이 보인다. 다시 북쪽으로 관림 정문을 보면 정문이 저 멀리로 보이니, 광장이 얼마나 넓은 지 알 수 있다. 정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이 넓은 터만 보더라도 관림이 단순한 무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정문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충(忠), 의(義), 인(仁), 용(勇)“ 네 글자가 보이는데 이는 관우의 성품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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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림정문의 문짝 (9x9=81개의 단추를 주목하시라)

안내자의 말로는 명나라 시대에 근처 농부들이 자발적으로 논밭을 기증해서 현재의 관림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말 자발적이었을까? 가이드의 이런 말을 듣고 보니 관우에 대한 신격화가 아직도 진행중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무덤만 하나 있었지만 명나라 때인 1592년에 사당을 짓고 측백나무를 심어서 성역화했다고 한다. 현재와 같은 규모로 관림이 커진 것은 청나라 건륭제 연간으로 그 당시에 건물을 150칸으로 증축해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왼쪽 사진은 관림 정문의 대문 한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이하게도 문짝에 노란 색 돌기들을 가지런하게 배치해 놓았다. (안내해주시던 분이 이것의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지금은 잊어버렸다.) 문짝에 붙이는 이 돌기는 집주인의 신분을 알려주는 중국의 전통양식이라고 한다. 고위 관료들은 7x7=49개까지 문에 달 수 있었고 9x9=81개는 황제만이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잘 세어 보면 빨간 바탕의 문짝에 가로 아홉줄 세로로도 아홉줄의 81개의 금색 돌기가 뚜렷하다.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관우는 송나라 휘종때인 1102년에 충혜공(忠惠公)이라는 공작 작윌를 받았다가 1107년에는 무안왕(武安王)에 봉해졌으며 명나라 신종때인 1613년에 관성제군(關聖帝君), 청나라 선종때인 1828년에는 관성대제(關聖大帝)에 봉해져 왕에서부터 결국 황제로까지 추서된 것이다. 역대 중국왕조들에게 있어 관우의 충의(忠義)는 정권 유지에 훌륭한 역할모델을 담당했을 것이다. 송나라 때부터 경극 등을 통해 관우를 홍보한 것도 정권의 권력 유지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이었던 박정희정권에 의해 광화문의 세종대왕상이 이순신장군상으로 대체되면서 충무공이 민족의 성웅으로 부각된 것과 같은 맥락이고 볼 수 있다.

“대전
▲ 정문에서 바라본 의문(依門) - 대전(大殿) 입구 - 에 늘어선 측백나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관림의 기초를 다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415년 전인 1592년이었다. 당시에 많은 측백나무를 관림에 심었는데 현재는 800여 그루가 관림의 하늘을 뒤덮고 있다. 400여년 전부터 측백나무를 옮겨다 심었기 때문에 수령이 대부분 300년이 넘고 700년이 넘은 것도 있다. 지름이 1.2m가 넘는 것들도 있다고 한다.

“대전“▲ 대전(大殿) 관림석사어도(關林石獅御道). 깃발을 든 분이 우리 가이드.

의문(依門)을 지나면 관림의 중심건물로 배전(拜殿), 평안전(平安殿)이라고도 부르는 대전(大殿)이 나온다. 의문과 대전을 연결하다. 석사자가 늘어서 있다고 이 길을 '관림의 돌사자길'(관림석사어도; 關林石獅御道)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관제상“
▲ 대전(大殿)에 봉인된 관제상. 황제의 모습이다.

관림은 중국고대 건축물의 특징을 대표적인 구조물이다. 고대 중국의 건축양식은 남쪽에 정문을 두고 북쪽으로 주요 건물을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관림 또한 무루(舞樓), 정문, 의문(依門), 용도(甬道), 대전(大殿), 이전(二殿), 삼전(三殿), 석방(石坊)과 팔각정(八角亭)이 중심선위에 있고 관우의 능인 관총이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우리가 간 길도 정문, 의문, 대전, 이전, 삼전을 거쳐 관총에서 끝을 맺는데 모두 일직선으로 움직인 것이다.

관림의 중심건물은 관우를 모신 대전(大殿)이다. 대전은 높이 26m의 궁전식 건물로 유리기와를 이고 있다. 대전에는 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 여포(呂布, Lvbu)와 세번 싸운 이야기 등 관우의 일대기가 조각과 벽화로 새겨져 있다. 대전 중앙에 봉인된 관우좌상은 높이가 6m에 이른다. 이전(二殿)과 삼전(三殿)에 모신 관우상이 장수의 복장을 하고 있는 반면 대전의 관우상은 용으로 조각된 의자에 몸에 용포(龍袍)를 입고 머리에 왕관을 쓴 신성하고 장엄한 제왕(帝王)의 모습을 하고 앉아있다.

용상에 앉아 있는 이 관우좌상(關羽坐像)은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버들가지처럼 늘어진 장식을 유(旒)라고 한다. 실에 구슬을 꿰어 맨 유는 그 갯수로 지위를 나타내는 것인 모양이다. 천자는 12개를 달았고, 제후는 9개, 상대부는 7개, 하대부는 5개를 달 수 있었다고 한다. 관우도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있으니 확실히 천자의 지위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신으로 모시기 시작한 가장 큰 역사적인 사건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정변이라고 한다. 1399년에 주체가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는데, 그가 바로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다. 영락제는 '관우의 영험한 도움을 얻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고 했는데 이는 '하늘의 뜻'이었음을 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황제가 관우의 도움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당시 민중들이 이미 관우를 신으로 모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황제조차도 관우를 신으로 인정해버린 것이 이미 600년도 전의 일이다.

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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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훈(htlaz) 2024-04-28

벌써부터 장사의 신이 관우에서 알리바바의 마윈으로 넘어갔죠! 잘 읽고 갑니다.

잘 보구 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