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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떠난 스쿠터 여행, 모항에 가지마라.

<전라북도 부안면 모항>

세계여행을 다녀온다며 과감히 사표를 던진 친구가 1년 반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다녀왔더니 벌써 1년 반이 지나버렸다고 했다. 친구는 지구가 정말 넓다며 씨익 웃었다. 라오스의 하늘에는 천억 개의 별이 쏟아져 내렸고 인도네시아의 어느 오지마을 게스트하우스에서 온 종일 수백 개의 번개가 호수에 떨어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친구는 내가 본 가장 부러운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친구가 그랬다. 여행을 하면서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헤엄을 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불을 피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이 스쿠터 타는 법이라고 했다. 수영이랑 불 피우는 것은 자신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딱 한 번 타본 것 외에 스쿠터에 대한 기억은 내게 없었다. 그래, 스쿠터 타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덜컥 스쿠터 여행을 떠났다. 가을의 한복판에 놓인 국도를 신나게 달리고 싶었다. 어디로 떠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스쿠터를 탄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시인 선배가 밥을 사겠다고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유쾌한 담소를 나누던 중에 선배는 여행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그가 다녀본 알려지지 않은 곳들은 한 편의 시와 같았다. 그는 여행을 다녀오면 시를 쓰게 된다고 했다. 그가 썼다는 시에 대해 듣자마자 내 여행의 목적지가 정해졌다. 이미 함부로 간 적이 있었던 그곳은 모항이었다.

그대, 함부로 모항에 가지마라.
- 림태주 -

아무 생각 없이 모항에 갔다
사는 게 시들하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고
서쪽바다 낙조가 울컥 몸살로 다가오는
인생의 어떤 가벼운 날

바닷물은 멀리 빠져나가고
불편한 심사를 감춘 늙은이처럼, 모항은
갯벌 위에 흰 뼈 같은 몇 척의 배를
간신히 붙들어 두고 있었다

저도 허전하고 두려웠던 것일까
모항은 밤새 굵은 비를 뿌려
내 영혼의 수문을 위태롭게 했다
민박의 허름한 지붕을 두드려대는 빗소리가
끝내 잠의 제방을 허물고 아프게 스며들어왔다
마당에 배를 끌어다 단단히 묶었다

칠흑 같은 모항의 빗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꿈일 뿐이었는가,
햇살은 말라 있었다
호랑가시나무 잎을 따 바람개비를 불고
채석강에 엎드려 어린 게를 잡고
내소사 연못에 핀 아리따운 연꽃을 들여다보고
해창 갯벌의 싱싱한 해초 내음을 큼큼거리며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가벼운 날이
그렇게 내 인생을 지나간 줄 알았다
흰 뼈 같은 숟가락을 집어 든 적막한 저녁,
심연에 잠복해 있던 모항의 바다가 식탁 위에 쏟아져
시퍼렇게 출렁거리기 전까지는,
나는 무엇을
그토록 내 안에 붙들어 매려 한 것일까
어깨를 들썩이며 소금덩어리 같은
밥알을 우물거리기 전까지

원래 계획은 서울에서부터 스쿠터를 빌려 변산까지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초보자인 내가 350여 킬로미터를 가려면 꼬박 이틀은 걸릴 것이다. 그러면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스쿠터를 기차에 싣고 돌아와야 한다. 안전과 효율성을 고려해 전주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스쿠터를 대여해서 변산으로 가는 방법을 택했다. 다행히도 전주에 스쿠터를 대여해주는 곳이 있었다.

*스쿠터 대여문의 : 알렌트카(http://www.r-jj.co.kr/) 전주지점 063-251-0551

내가 고른 스쿠터는 클래식스쿠터 대림의 123cc Besbi다. 손잡이를 돌리는 정도로 속도조절이 되는 스쿠터로 의자 밑 공간이 넓어서 가방을 넣고 다니기 좋다. 핸들 앞에 작은 플라스틱 창이 있어서 날벌레 테러에 꽤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무게는 약 100 킬로그램으로 처음에 올라탔을 때는 ‘깔리면 죽겠다’ 싶기도 했는데, 막상 달려보면 무게감이 있어서 속도감이 잘 느껴졌던 것 같다.

대여점에서 풀페이스 헬멧과 장갑, 보호장비까지 다 빌려달라고 하니 헬멧가격이 대여료보다 더 비싸다고 조심의 조심을 신신당부했다. 스쿠터에 웬 풀페이스 헬멧인가 하겠지만 국도를 야간에 달려보면 풀페이스 헬멧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우선은 스쿠터를 탈 줄 모른다는 것을 사장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잽싸게 스쿠터를 두 발로 밀면서 끌고 나와 골목까지 끌고 갔다. 도착한 곳은 자갈이 꽤 많은 주차장, 거기서 스쿠터를 돌리다가 한 발이 끼는 바람에 살짝 위험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모래나 자갈에서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고 급하게 핸들을 틀면 미끄러진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어서 진짜 위험했을 뻔한 고비를 면할 수 있었다. 드디어 출발! 마치 운전면허를 처음 딴 후 차를 몰고 나갔을 때의 기분이었다. 묘한 스릴과 긴장감, 그리고 정말 스쿠터 여행을 시작했다는 설렘으로 심장이 요동쳤다. 출발이다!

함부로 모항에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가을 들녘의 석양을 본 적이 있는가. 끝간데 없이 펼쳐진 벼이삭의 물결은 여기가 황금바다가 아닌가 착각이 들만큼 황홀하다. 특히 석양이 지는 쪽을 향해 한참을 달리다 보면 이대로 멈출 수 없어도 상관없을 것만 같다. 그대로 길이 밤까지 연결되기만을 고대하게 된다. 그렇게 출발한지 7시간 후 모항에 도착했다. 모항은 마지막 해넘이에 숨죽이고 있었다.

해지는 것을 마저 다 보고 나니 모항에는 금세 밤이 찾아왔다. 막 개발되기 시작한 펜션지구로 갔지만 회를 못 먹는 내가 먹을 마땅한 음식이 없었다. 아니 유일하게 열고 있는 식당도 한 군데 밖에 없었다. 가게로 들어가니 때마침 그날이 가게 개업식이었다. 주변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새우며 삼겹살 바비큐까지 한 바탕 잔치를 열고 있었다.

불청객인 내게 사장님은 오늘은 음식을 판매하지 않으니 그냥 들어와 한 상 먹고 가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가게 앞에 스쿠터를 주차하는 걸 내내 지켜봤다며 서울에서 왔으니 배고프겠다며 맘 좋은 웃음을 한껏 지었다. 얼결에 바비큐, 새우, 김치찌개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 전어까지 서울에서도 못 먹어본 대접을 받았다.

돌이켜 보면 여행길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이 넘치고 친절했다. 그 옛날 섬에 갇혔을 때도 선뜻 방을 내주고 따뜻한 김국을 끓여주었던 아주머니도, 모항에서 만난 개업식당 사장님도 청춘이 부럽다며 비빔밥을 사주신 닥터 할리 아저씨도.

어쩌면 한국인의 근본에는 어른을 공경하는 것보다 젊은 사람들을 예쁘게 봐주고 정을 나눠주는 내리사랑이 더 많이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사장님은 떠나가는 내 손에 개업선물까지 쥐어주셨다. 지금 그때 주신 컵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모항의 아침은 고요하다. 멀리서 파도마저 소곤소곤 소리를 줄인다. 바다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의 모항은 선잠에 빠진 듯 해변을 걷는 이의 발자국 소리마저 삼킨다. 속살을 드러낸 바다의 연한 살갗 위에 가만히 앉았다. 하늘과 바다와 모래가 경계를 허물고 서로 번지듯 엉겨있다. 새벽의 모항은 시시각각으로 색감이 변하고 있어 그저 해가 솟을 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다.

모항에서 빠져나와 또 산모퉁이를 돌면 작은 등대가 있는 방파제가 있다. 낚시배가 정박해 있는 방파제에는 하얀 등대가 우쭐한 듯 서 있다.

스쿠터를 탄 채로 방파제 끝까지 갔다.
밥 딜런의 ‘Knocking On Heaven's Door’가 아까부터 계속 입 속을 맴돌고 있다.

That long black cloud is comin' down.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넓게 퍼져가는 검은 구름이 다가오고 있어요.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시인 선배가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모항에 갔다가 갯벌 위에 흰 뼈 같은 몇 척의 배를 보고, 밤새 내린 굵은 비에 영혼의 수문이 위태로웠던 모항에서의 하룻밤이 그렇게 어떤 가벼운 날로 지나간 줄로만 알았었는데. 어느 적막한 저녁 식탁 위에서 심연에 잠복해 있던 이 바다가 식탁 위에 쏟아져 출렁거렸다고 했다. 결국 심하게 모항을 앓고서야 모항이 치명적인 기억을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10년도 전에 다녀갔던 그때의 모항이 오늘의 모항과는 사뭇 다르지만, 유료 갯벌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외쳐대는 방송이 이따금 돌아보게 만들지만, 모항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스쿠터를 타고 여행을 한다고 하면 하나같이 신기해하고 또 대단하다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참 예쁘게 봐주는 미소를 지어준다. 처음 타서 오는 데만 일곱 시간이 걸렸다고 하면 어른들은 ‘어이구, 어이구’하며 어느 새 내 어깨를 두드려준다. 서른 한 살의 내가 도시에서는 받아보지 못한 다독임이다. 스쿠터에 풀페이스 헬멧을 쓰면 소위 ‘간지’가 떨어진다고 하는데 여행의 어디에서도 그런 시선을 받아 본 적 없다.

스쿠터 여행의 좋은 점은 길 위에서 그냥 스쳐갈 수 있는 사람들과 한 번 더 마주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달려가고 있는 공기와 온 몸으로 부딪히고 바람의 품에 안겨 다닌다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자연은 촉각, 후각, 시각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하고, 차에 탔으면 눈여겨 보지 못할만한 것들을 죄다 볼 수 있다. 언제든지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고, 짐을 지고 다니지 않아서 좋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다 보면 땅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아직은 미숙한 운전실력이라 돌이라도 밟으면 미끄러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계속 노면과 주변을 둘러보다 보면 어느 순간 저 멀리에 있는 작은 돌멩이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낀다.

<원티드Wanted>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총으로 파리 날개를 쏘기 위해 집중하는 장면이 있는데, 집중하면 할수록 파리가 점점 커져서 결국엔 절대로 못 맞출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양궁선수들도 고도로 집중하게 되면 70 미터 떨어진 거리의 과녁이 점점 커진다고 한다. 스쿠터 여행의 보너스는 바로 집중력 훈련이다.

서울에서 전주, 전주에서 변산을 거쳐 모항까지 장장 10시간에 걸쳐 도착한 모항, 어떤 면에서는 함부로, 또 어떤 면에서는 어렵게 왔다. 함부로 오지 않아도 모항은 여전히 출렁이는 것 같다. 이 새벽, 강원도에는 폭설이 내렸다는 11월의 끝자락에서 가을의 한복판에서 만난 모항의 바다가 내 책상 위에도 쏟아져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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