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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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나 영양갱, 새우깡 같은 과자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스테디셀러’인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해외한인들은 모여 앉아서 추억을 나눌 때면 항상 등장하는 화제가 ‘무교동 낙지’와 ‘장충동 족발’입니다. 태생이 촌놈이라 서울의 그 맛을 모르기에 무교동과 장충동을 한 번 순례해보고 싶습니다. 필자가 방문할 때까지 그곳이 건재하길 바랍니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 입맛은 여전한 것이 신기합니다. 한 신문에 관련기사가 실렸더군요. 오랜 추억이 혀를 통해 뇌에 기억되어 익숙한 것들만 먹으려고 한다구요. 그래서 식품회사들은 새로운 스낵을 자주 출시하지 않고, 오래된 메뉴만 우려먹는다고 합니다. 삼양이나 농심이나 라면이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인 모양입니다.
따지고 보면, 개화 이래로 서양문물이 들어와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습니다. 기왓집 한옥은 아파트로, 서당은 학교로 대체되었습니다. 경제활동도 농사에서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으로 바뀌었고, 식자의 상징이던 한자는 영어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은 국한문 혼용체에서 한글전용으로 바뀌었다가 지금 괄호 안에는 한자 대신 영어가 들어갑니다. 정말 100년 만에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만, 한가지 우리 문화를 확실히 지키고 있는 것은 음식입니다. 미국식 스테이크 하우스와 프랑스 요리 그리고 중식부페와 일식횟집이 난무하지만, 밥과 김치(찌게), 된장(찌게)의 자리는 온전합니다. 미역국이 산모에게 주는 느낌처럼 음식은 영양만이 아니라 힐링을 주는 플레시보 효과가 강한 약품이기도 하며, 기독교의 성찬식처럼 예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What you eat is what you are. (당신이 무엇을 먹느냐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라는 경구까지 있습니다. 그동안의 어지러운 변화 아래에서도 우리는 음식문화만은 지켜냈습니다. 먹는 이야기로 시작했더니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헤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다이어트는 내일로 미루고 이제 본론으로 가봅시다.
최근 뉴욕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신 높은 분이 만원권 두장을 발권기에 집어넣어 웃음을 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도 비슷한 짓을 하지 않을까 하여 조롱보다는 동정이 앞섭니다. 가끔 들르는 파리의 지하철역 발권기 중에는 버튼식이 아니라 롤러식인 곳이 많습니다. 기계 위에 수평으로 놓인 긴 롤러를 굴려 자기가 원하는 메뉴를 선택하는 방식인데, 그 앞에만 서면 긴장이 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은 새로움을 만나는 연속의 시간이었습니다. 초중고 시절에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담임 선생님과 급우들과의 만남은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이었습니다. 이제는 기계와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업무와 연구라는 것이 컴퓨터로 하는 작업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시절이니까요. 기계들은 점점 더 기능이 많아지고, 프로그램들도 불필요해 보이는 메뉴가 너무 많아 복잡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용하는 휴대전화에 익숙해질만 하면 모델을 바꿔야 하고, 메뉴들이 전부 자리를 바꿔 세팅에 쩔쩔매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은 무슨 비결이 있거나 따로 공부를 하는 줄 알았더니, 그냥 두려움 없이 여기저기를 눌러보는 ‘시행착오법’이라는 무공을 사용하더군요. 지식과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인지라 노트에 메모하기 보다는 계속 찔러보는 것이 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저녁 식탁에 돌아와 앉기 이전의 모든 시간들은 늘 새로움을 접해야 하는 긴장되는 시간입니다. 새로움을 두려워하면 퇴물이라는 오명을 덮어 쓸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방법은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냥 이렇게 살다 죽게 내버려둬!’라고 고집을 부리다가,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죽은 인간이지 않은가?’라고 반문해보고는 마음을 한 발 앞으로 내딛어야 합니다.
돌이켜보면, 익숙한 사람들과의 관계로만 한정하고 타성에 젖은 관행만이 지고의 가치인 줄 알 때 정치는 타락했습니다. 지성은 미발견의 세계와 생각에 대한 호기심으로 커갑니다. 새로움이 곧 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움은 선에 대한 성찰을 줍니다. 그래서 낡음은 새로움과 비교를 통해서만 미래로 가는 외분점을 찍을 수 있습니다. 늘어나는 수명 덕택에 우리는 이제 더 많은 변화를 더 오래도록 겪어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피할 수 없으니 받아들이고 즐기는 수밖에요. 남은 인생을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아직도 가야 할 길과 두드려야 할 문이 많다는 생각으로 늘어나는 수명을 의미있게 향유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니 로봇이니 드론 같은 신기술이 많이 걱정스럽습니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떠들지만, 잘못되면 이 문명을 전부 말아먹고, 제5차 산업혁명은 호미와 곡괭이로 다시 출발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새로움을 배격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옥석을 가릴 필요가 있습니다. 위험을 피할 수 없으니, 맞닥뜨려 길들여야 합니다. 야생견을 반려견으로 만들듯이 말입니다. 옛날 중국 은나라 왕조 때 탕왕의 구호라는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 아직도 유효한 진리인 것을 보면, ‘새로워지기’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운명인 모양입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어지럽기 보다는, 더 재미있어지는 우리가 되어야죠. 그리고 새로운 발전으로 인간을 더 지우기보다, 높이는 과학기술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구촌 곳곳의 코세니아들에게 봄이 오는 소리로 안부 전하고 싶습니다.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새로운 것들이 너무도 많아서 미래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하여 고민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의 벚꽃이 마음을 설레게 하네요 글 속에서 선생님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멋진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