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이달의 주자: 이미진) 나오미 울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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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여성주의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저 무언가 이상하다고 자각한 문제를 하나 둘씩 곱씹어보고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레 스며 들었습니다. 제게 여성주의는 거대한 사상도 이념도 그저 저를 둘러싼 일상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는 장이었습니다. 그만큼 여성을 둘러싼 문제가 만연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저는 이 관점을 다소 이상하게 활용(?)했습니다. ‘나의 일상 문제’이기 때문에 굳이 관련 서적을 읽어보려 애 쓰지 않았고, ‘나의 일상 문제’이기 때문에 모임에 나가 의견교류를 하고 토론하려 애 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혼자 몰두하고 고민하다 이렇다 할 속시원한 결론 없이 쳇바퀴처럼 빙빙 돌며 답답함의 굴레에서 맴돌았죠. 그러다 우연히 나오미 울프의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정독한 페미니즘 도서겠네요
저는 제게 어울리는 예쁘고 멋진 옷을 사고, 다양한 색상을 조합하여 화장하는 것을 무척 즐깁니다. 우스갯소리로 "머리, 화장, 옷 삼박자가 안 맞으면 그 날은 바로 퇴근하고 싶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무척 동감합니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그날은 밖에 있기가 싫더라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에서 '어긋났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옷이 화려한지 깔끔한지, 화장이 진한지 연한지, 머리가 차분한지 발랄한지, 모든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제게 '어긋났다'의 기준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 편이지요. 최근에는 발레를 감상하고 직접 하는 것에도 푹 빠져서, 일반인 수준에서 최소한 '발레 동작을 했을 때 잘 어울리는 몸이 되고 싶다'는 욕심까지 추가되었습니다.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하고 있지는 않고, 기본적으로 식욕도 저조한 편이지만 살이 찌지 않게 신경은 쓰고 있달까요.
다른 사람이 어찌 바라보느냐 보다 자기만족을 위해 머리, 화장, 옷을 즐기고 체형 관리에 신경 쓴다는 저는 "정말 그럴까?"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 내 마음에 드는가 -가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실한데, 과연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걸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내 눈에 만족스럽고 예뻐 보인다는 것의 구체적인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이 정말 사회에서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기준과 완전히 독립적일까? 주체적인 기준을 구축한 척 하지만, 사실은 그를 방패로 삼아 -누구보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기준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고민은 결국,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일테죠. 왜 유독 여성들에게 이 ‘아름다움’의 잣대를 가혹하리만치 들이대는 걸까요? 쌍꺼풀 수술은 성형도 아니라는 말이 돌아다니는 때입니다. 각종 여성 잡지에선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마른 모델들이 한껏 매력을 과시하고 이미 충분히 ‘건강한 정상 체중’인 여성들은 자신을 뚱뚱하다고 여깁니다. 이런 여성들을 겨냥한 다이어트 산업도 비대하게 커지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시대가 달라져서 남성들에게도 비슷한 요구가 생겨나고 있지만 말입니다.
나오미 울프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 책은 일(2장), 문화(3장), 종교(4장), 섹스(5장), 굶주림(6장), 폭력(7장), 총 여섯 가지의 부문에 걸쳐서 ‘아름다움’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어 오는지, 그것이 여성을 얼마나 병들게 하는지 풀어놓습니다. 1991년에 출판된 이 책은 발매 당시 엄청난 화제를 일으키며, 막 시작된 페미니즘의 ‘세 번째 물결’에 박차를 가하는데 엄청나게 기여를 했다고 하네요.
페미니즘의 첫 번째 물결은 19세기 초에 여성의 법률적 권리 신장을 위해 일어났다고 합니다. 가령 참정권 확보같은 것이 해당되겠죠. 이후 1960년대 초에 사회문화적인 차별 문제 해결에 주력을 둔 두 번째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가정에서 여성이 하는 역할을 ‘신비롭다’는 프레임을 씌워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았던 것을 타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21세기 초, 세 번째 물결에서는 백인 이외의 여성과 동성애 문제까지 함께 다루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앞서 말한 ‘신비주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자 이제 ‘아름다움’의 신화를 내세워 여성의 진보를 방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시대를 살아가게 됩니다. 페미니즘은, 완전하지 않고 ‘불완전한 남성’인 여성이, 남성 중심의 기존 권력구조에 편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기득권과의 지난한 싸움인 셈입니다.
책의 내용을 좀더 보태자면, 사회는 가사일이라는 소임이 얼마나 신비롭고 신성한가를 강조하여 여성을 가정에 머물게 하려고 했습니다. 기껏 가정을 나오더라도 동일노동 대비 저임금과 더 많은 업무시간을 강요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성은 가정을 박차고 사회로 뛰쳐나오려 한 겁니다. 사회로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는 이 많은 노력이 실패하자 새로운 장치가 필요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그 장치가 마치 절대적인 기준과 이상형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려지는 ‘아름다움의 신화’입니다. 결코 절대적이고 객관적일 수 없는, 지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그 ‘아름다움’ 말이죠. 실력과 더불어 일정 이상의 아름다움을 요구하여, 아름다움을 갈고 닦는데 신경을 기울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갈고 닦는 과정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절대적인 이상형으로 이루어진 여성의 거푸집(책에서는 이 거푸집을 ‘철의 여인’이라 부릅니다)에 주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첫 장에서 “여성이 공적 영역에 대거 진출하면서, 외모 기준에 관한 법률이 쏟아진다. 아름다움의 신화가 정치적 영역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라는 글귀를 필두로 어떻게 여성이 스스로 “주조”하게끔 교묘하게 압박해 왔는지 조목조목 따집니다.
약 20년 전에 출판된 책이기 때문에 현재와는 사뭇 다른 부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차별을 더 깊게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보내왔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여전히 이질감없이 느껴지고, 감정적으로 동감하는 부분이 많아 슬펐습니다. 일부 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 업계의 은어로 말하면 “앵커클론”으로 복제품이 된다. 통칭으로 불리는 일반적인 것은 대체가 가능하다. 그래서 젊음과 아름다움이 있으면 눈에 보이지만 자신의 특성이 독특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불안하고, 젊음과 아름다움이 없으면 눈에 보이지 않아 말 그대로 “화면에서 사라진다.” …여성에게 윗사람이라는 지위는 특권이 아니라 지워짐을 뜻한다." – 일(2장)
20년전 미국 뉴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던 "삼촌 같은 남성 앵커에, 한참 어리고, 직업적 미인 수준으로 예쁜 여성 뉴스캐스터"가 붙어있는 문화를 꼬집는 부분에서 나온 글입니다. 미국 뉴스를 즐겨보지 않아 현재 미국 사정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중년의 남성 앵커와 젊은 여성 앵커의 조합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광경이지요. 마지막 구절은 현대 사회에서 나이 든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잘 나타내고 잘 대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40세가 넘은 TV 앵커 중 97%가 남성이고, 나머지 3%는 자기 나이 같지 않아 보이는 40세쯤 된 여성"이라는 주장이 있었던 것처럼요.
"유방, 허벅지, 엉덩이, 배, 이것들은 여성의 몸에서 가장 성적인 곳이고 따라서 그것이 "못생긴" 것이 강박의 대상이 된다. 그것을 폭력을 휘두르며 학대하는 남성이 가장 흔히 구타하는 곳이다. 치정 살인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훼손하는 곳이다. 폭력적인 포르노에서 가장 자주 더럽히는 곳이다. … 여성을 혐오하는 문화가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을 여성이 혐오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 섹스(5장)
"남자아이들과 달리, 여자아이들은 타인에 대한 욕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망을 배운다." – 섹스(5장)
누군가를 원하는 능동적인 욕망이 아닌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수동적인 욕망을 배워 온 여성들은 이제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게 됩니다. '철의 여인'이 지니고 있는 풍만하고 아름다운 가슴과 늘씬한 허벅지와 배, 탄력 있는 엉덩이와 자신의 몸을 한없이 비교하며 질책합니다. 여성의 신체와 몸무게는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란 틀까지 뒤집어 씌워 어떠한 방법으로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여성을 은근히 비난하여 그 여성이 절망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사회 요구를 기반으로 한 여성의 수동적인 욕망과 파생되는 절망의 틈새를 파고들어, 얼굴 성형은 물론 가슴 확대, 지방 흡입, 복근 성형 등 각종 성형외과, 다이어트 시장이 엄청나게 커졌죠. 심지어 최근에는 골반 크기까지 성형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두상이 큰 게 콤플렉스여서 농담으로 "두개골을 깎아야 할 판이야."라는 말을 했는데, 이러다 진짜 머지않은 미래에 성형외과에서 흔히 접하는 수술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회가 정말 정상일까요? "성형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한다"라는 의견은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입니다만, 그 '만족'의 방향이 왜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강남에 즐비한 성형외과 광고를 보면 모두가 같은 얼굴로 보입니다. 인터넷에 한참 "모두 다른 사람"이라는 타이틀로 올라온 십여명의 여성 사진이 있었는데, 댓글에선 입을 모아 "한 사람인 줄 알았다"는 의견이 줄지었습니다. 정말 '철의 여인'이 존재하는 느낌입니다.
"자유롭게 길러진 여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여성의 극단이 허용하는 것 보다 성기중심적이고, 건강하게 이기적이며, 남성의 몸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다. 자유롭게 길러진 남성은 아마 남성의 극단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감정적으로 몰두하고 상처받기 쉽고 건강하게 주고 몸 전체가 관능적일 것이다." – 섹스(5장)
"여성성은, 여성이라는 것에 지금 사회에서 파는 모든 것을 합친 암호다. 여성성이 여성의 성과 그것의 사랑스러움을 뜻한다면, 여성은 그것을 잃은 적이 없고 따라서 다시 살 필요가 없다." – 섹스(5장)
개인적으로 '여성적' '남성적', 이하 유사한 단어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마침 이 책에서 저와 같은 이유로 그 단어의 문제점을 짚는 부분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굉장히 포괄적인 두 단어가 일종의 '바람직한' 여성상과 남성상을 제한하고, 그를 여성과 남성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적어도 제게는, 남자아이가 인형놀이를 더 좋아해서 나중에 유능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될 가능성, 여자아이가 자동차놀이를 좋아해서 멋진 카레이서가 될 가능성을 없애 버리는 단어입니다. 울고 싶은 남성의 감정을 억제하고 여성의 대담한 활동을 제한하는 단어이고요. 이 단어만큼 남성의 감성을 소홀히 다루고, 여성의 이성을 무시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짧은 소견으로는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의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권신장 뿐만 아니라 남성을 '남자다움'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남성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추구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용한 위 문단도 비슷한 흐름이라 생각해서 가져와 보았습니다.
작가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는 것이 독서의 본질이 아니듯, 저자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시대가 바뀌는 바람에 반가운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게 된 내용도 있고,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과하지 않은가?' 하는 아리송한 부분이 있어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권리들이 처음에는 '과하다'싶을 정도의 문제제기로 출발하였다는 공통분모가 있죠. 익숙해졌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저도 여성 문제를 항상 고민하지만 매일매일 새로이 깨닫고 배우는 것을 보면 아직 그 굴레에서 못 벗어난 부분이 분명 많고요. 그리고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들의 진위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여성의 감정을 묘사하는 부분은 제가, 친구가, 다른 여성이 느끼던 것과 상당히 일치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적어도 감정 부분은 거짓이 아닌 셈이지요. 혹자는 피해의식이라고 볼 것이고, 그것이 실제로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그 피해의식 자체가 억눌림의 방증은 아닐런지요. 마지막으로 평소에 가장 흔히 그리고 강하게 고민해왔던 부분을 반갑고도 씁쓸한 마음으로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오늘날에는, 젊은 여성에게, 행동은 "진짜 남자"처럼 하기 바라고 모습은 "진짜 여자"처럼 보이기 바란다. 아버지들이 한때는 아들에게만 했던 기대를 딸들에게도 했지만,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부담은 그만큼 가벼워지지 않았다."
이상훈 박사님은 KAIST에서 통계물리학과 연결망 과학을 주제로 하여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스웨덴 우메오 대학 물리학과와 영국 옥스퍼드 대학 수학과에서 박사후연구원, 성균관대학 에너지과학과 연구교수를 거쳐, 지금은 고등과학원(KIAS) 물리학부에서 연구원으로 재직중이십니다. 오로지 "연구 한 길만 간다!"라는 기운을 뿜뿜! 내뿜는 과학자처럼 보이지만, 사회의 이런저런 이슈에도 관심이 많으시고 다양한 분야의 책도 많이 읽으십니다. 특유의 날카롭고 냉철한 관점으로 녹여낼 이상훈 박사님의 책 소개가 무척 기대됩니다.
철의 여인은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고 점점 그 수가 늘어나겠죠? 그러면 나중엔 철의 여인이 더 많아질 것이고...
다음엔 또 새로운 철의 여인이 나오려는지... 답답한 일이죠. 본성을 고치기는 어렵겠지만 교육의 철학과 방향에서는 분명 변화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