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차 산업혁명 축복일까? 재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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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AI나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아직 외국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지만, 관련기사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중에는 아주 획기적이거나 아니면 매우 끔찍한 내용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고령화가 심한 일본에서는 간병인 로봇을 개발중이며, 실제 현장에 투입하여 간단한 일은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로봇에게 이미 작고한 배우자의 목소리를 넣어서 환자의 정서적 안정을 도모하려고 한다는 기사를 보고는 아연실색했습니다. 당연히 가능한 일이고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정신이 혼미한 노령자는 자신이 이미 죽어서 내세에서 배우자를 다시 만난 것인지, 아니면 죽은 배우자가 다시 이승으로 환생한 것인지 정말 오락가락할 때가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일전에 자율주행차량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사고위험이나 해킹을 걱정했습니다만, 이번에 제가 접해본 기사는 상당히 새로운 면을 보여줍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자율주행이 실현되면 차량 에너지 소비가 늘어날 것인가 아니면 줄어들 것인가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저는 에너지 소비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미국 BCG (Boston Consulting Group) 조사에 의하면 반 정도로 줄어들 것이라는 견해와 오히려 두 배로 증가할 것이라는 견해가 대립된다고 합니다. 줄어든다는 견해는 아마도 운전과 주행코스의 최적선택 같은 기술에 의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훌륭한 운전사 (코너링이 좋다는 어느 집 아드님 같은…)에게 핸들을 맡기고, 가장 훌륭한 GPS로 실시간 교통상황을 살펴보며 운행하는 상황처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두 배로 증가할 것이라는 견해가 재미있습니다. 만약 회의장에 조금 일찍 도착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뒷좌석에 타고 있던 차주는 지하에 파킹을 지시하고 회의장에 올라가 조금 기다리는 대신에, 자신은 차안에서 자료를 보며 앉아있고 차에게는 주위를 천천히 배회하라고 지시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무수하게 파생될 이런 ‘잔머리’ 행위는 지금으로서는 완벽하게 상상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도심은 파킹비가 비싸니 도심에 들어오면 차를 계속 돌게 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면 뒤이어서 승객이 없는 차는 주행을 막는 법안이 생길 것입니다. 아마도 승객유뮤를 표시하려고 택시처럼 차량 위에 색깔 다른 불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기술은 인간에게 도구를 제공하는 선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AI나 제4차 산업혁명은 도구를 넘어 인간 본질까지 대체하려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도 인류가 살아남는다면, 제4차 대전에서는 돌이나 막대기로 전쟁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즉 모든 문명을 말아먹고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도 여전히 전쟁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쟁이 아니라, 호팅 박사도 염려했듯이 AI가 인간을 파괴할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길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현재의 휴대전화 같은 것입니다. 처음에 휴대전화가 나왔을 때, 거부하고 휴대전화 없이 사는 사람들이 소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특히 한국에서는 모든 인증을 휴대전화 번호로 하는 세상이니, 전화 번호가 주민등록 번호보다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휴대전화 없이 산다는 것은 세상 밖에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제 신기술이 생겨나도 우리는 그 길로 가지 말자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아니 오히려 추종그룹에서 벗어나 선도그룹에 속해야지 뭐하고 있냐며 채찍질하는 시대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을 여기에 적용하려니 마음이 좀 불편합니다만, 최선이 무엇일까요? 법과 제도를 미리 정비하는 일입니다. 기술이 적용되어 문제가 생기면 비로소 입법 토론이 활성화되고, 이해관계자들간의 견해를 조율하느라 세월이 또 가게되어 법은 늘 뒷북을 칩니다. 현재 대부분의 나라는 죄형법정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라틴어로 하면 Nulla Poena Sine Lege (Null Punishment Without Law)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으면 나쁜 짓을 해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사회환경이 급격하게 조성되면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무수한 사건-사고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격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거나 죽어나간 후에야 비로소 법이 만들어지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장면들을 익숙하게 보아왔습니다. 기술은 지수함수적으로 변하지만 법은 선형함수로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늘 새롭게 다가옵니다만, 이제는 도대체 어디가 외양간인지도 아리송해지는 세상입니다. ‘인문학의 전성시대’라는 구호는 기술과 인간을 겹합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 없이는 허망한 슬로건입니다. 새해에는 과학기술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우리 사회의 집단지성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법을 만들면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권력자들은 법안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 둡니다. 토끼와 거북의 경주에서 권력자인 토끼가 약자인 거북을 경주에 끌어들인 것처럼...법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평등이라는 포장속에 숨겨진 불평등을 4차산업이라는 명분으로 강가를 더 강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인문학의 전성시대 라는 구호에 대해서 무엇을 갖추어야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