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현현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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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상당히 괴이하죠? 현현기경은 거의 천년 전에 중국에서 출간된 바둑 책 이름입니다. 제목을 번역하면 ‘신비로운 바둑 바이블’ 정도가 될 것입니다. 남송시대에 처음 나왔고, 원나라 때인 1300년대 중반에 재출판된 책이라고 합니다. 그 긴 세월동안 현현기경은 바둑계에서 비전처럼 전해내려오던 책이며, 저도 대학시절 이 책을 넘기며 바둑돌을 놓아본 기억이 있습니다. 반면 ‘신 현현기경’은, 제2차대전 전후 일본에서 활약했던 중국계 기사 오청원 9단이 출판한 책 제목입니다. 오청원 9단은 바둑계에서 일본을 흔든 중국판 ‘바람의 파이터’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분입니다. ‘치수 고치기 십번기’를 비롯한 수많은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아재 개그적 분석에 따르면, 한국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듣는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 3위가 군대 이야기, 2위는 축구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망의 1위는 둘을 결합한, 군대에서 축구하던 이야기라고 하네요. 아마도 바둑은 그 바로 뒤인 4위 정도에 오르지 않을까 합니다. 소녀시절, 바둑판 앞에서 꼼짝도 안하시던 아버지 잔심부름이나, 신혼시절 주말에 바둑친구를 집으로 부르던 남편에 대한 기억을 가진 여성들이라면 바둑이라는 소재가 비호감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이니까 기대를 접지 말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한참 전에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인간의 완패로 승부가 난 사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재미있는 일은 바둑 9단을 ‘입신’이라고 부릅니다. 신의 경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은 고사하고 인간이 만든 컴퓨터에게도 졌습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한 30년전쯤 한 밤에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11시에 만납시다’ 라는 KBS 토크 코너에 한국의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이 초청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신과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면 몇 점을 먼저 깔고 둬야 이길 수 있겠냐는 질문에, 임해봉 9단은3점만 깔면 확실히 이기겠지만 확실히 목숨을 보존하려면 아무래도 4점은 깔아야 할 것같다고 했다면서, 조훈현 9단은 어떻냐고 아나운서가 물었습니다. 임해봉 9단과 조훈현 9단은 앞에서 언급한 오청원 9단의 제자들입니다. 조훈현 9단의 대답도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런데 이세돌은 알파고에게 허무하게 패했고, 알파고는 프로기사들 모두가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묘수를 몇 차례 두었다고 합니다. 일년쯤 지나 알파고에게 3연패를 당한 중국의 최강자 커제는 알파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가늠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바둑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완패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가집니다. 풍류를 좋아하는 동양이 냉혹한 과학적 사고를 하는 서양의 지배력 아래에 놓일 수 밖에 없었던 역사와 현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천년간 연구해온 바둑이 불과 환갑나이에 불과한 컴퓨터에 의해 제압당했다는 것도 충격이었습니다
필자는 여기에서 우리가 의존하는 경험우위적 지식론을 경계하고 싶습니다. 유사 업무에 경험이 많다는 것만으로 새로운 문제를 돌파할 내공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유사 경험은 시행착오를 줄이고 시간을 절약해줍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신의 한 수’의 탄생을 막는 선입견이 될 수 있습니다. 경험자들은, 몰라서 하는 소리라며 신입들 의견에 면박을 줍니다. 그래서 많은 당대의 고수들이 세월과 더불어 점점 꼰대가 되어가는 모양입니다. 씨니어 전문가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경계하기 위한 말입니다. 사실 경험론자들은 문제의 해답보다 문제를 막고 있는 제한조건에 더 해박한 지식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면 된다’ 보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에 더 전문적 소양을 가집니다. 정리하면, ‘그 길은 아니다’는 지식은 경험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었다’는 해답은 창의력을 동반한 고민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진짜 하고싶은 말은 지금부터입니다. 앞에서 꺼낸, 별 연관성 없어보여 쌩뚱맞기까지 한 30년전 김동건 아나운서와 조훈현 9단의 대담 프로그램 이야기입니다. “컴퓨터가 나와서 인간을 이기는 날이 오면 바둑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질문을, 30여년 전 그때 김동건 아나운서가 던졌습니다. 순발력이 좋아 조제비라는 별명을 가진 고수의 대답이 흥미로와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둑판을 한 칸씩만 더 늘리면 된답니다. 겨우 가로세로 한칸씩만 늘려도 엄청나게 증가하는 확률에 컴퓨터가 적응하려면 또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9단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가정해봅시다. 만약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대결하던 아침에 한 칸씩 늘어난 바둑판을 내어놓고 운동장 크기가 아주 약간 늘어났다는 통보를 하고 대국에 임했다면 결과가 어떠했을까요? 아마 한 달 전에 알려주었더라도 인간의 승리가 당연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계적 계산에서 컴퓨터에게 형편 없이 뒤지지만, 변화에 곧바로 적응하고 최적을 찾아가는데에는 컴퓨터를 확실히 능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서 구체적 계산은 부수적인 것이고, 큰 틀에서 봐야 하는 상황변화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단순계산능력이 약하다는 것만으로 인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수학 점수나 가진 돈액수가 아니라, 궁극적 목적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 실행을 향한 의지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둑판을 한 칸씩만 더 늘린다 와 대단한 답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