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2시, 페소아를 만나다 (이달의주자:이승미) 김운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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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코센회원인 저는 양자계산과학을 전공한 반도체 물리학자이며, 현재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더 고백하자면, 저는 ‘모태몸치’입니다. 고무줄 놀이, 사방치기, 땅따먹기, 무엇 하나도 잘하지를 못해요. 그러다보니 책과 자연스레 친해졌지요. 책은 어느 한 가지도 내게 요구하지 않는, 착하고 수동적인 친구라 여겼습니다. 대단한 착각이지요.
중학교 1학년 때는 대학생 큰언니가 과제로 읽고 구석에 쌓아 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우연히 집어들어 읽고선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습니다. 그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소위 문학소녀이던 내가 과학자가 되겠다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했으니, ‘수동적인 친구’인 책 한 권이 내 인생을 결정지어 버린 셈입니다. 그러니 사실 책은 무서운 친구인 거죠!
오늘 내가 소개하고 싶은 책은 김운하 작가의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2016, 필로소픽) 입니다. “페소아가 누구길래?”하는 질문이 먼저 드시죠? 저도 그랬습니다.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를 저는 이 책 제목에서야 처음 알았거든요. 페소아는 유로 이전에 포르투갈의 지폐 모델이기도 했던, 포르투칼의 국민작가더라고요. 그가 평생 출판한 저서는 다섯권에 불과하지만 1935년 사망 후에 발견된 미출간 원고가 산더미처럼 많아서, 아직까지도 정리 중이라고 합니다.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가 페소아의 위인전은 아닙니다. 페소아는 열 개의 장 중 하나의 장에서 논의될 뿐입니다. 대신 우리가 최소한 제목은 들어 본 『인간의 굴레』, 『위대한 개츠비』, 『댈러웨이 부인』같은 소설이 줄지어 등장합니다. 왜 하필 소설일까요? 혹시 저자가 소설가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작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든 소설은 모든 세상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라고요. 이 책은 형식적으로는 리뷰 에세이지만, 다른 소설을 소재 삼아서 저자가 전하고 싶은 철학을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책의 부제도 ‘나를 묻는 밤의 독서’거든요. 저자는 14권의 소설을 재료삼아 ‘나’라는 자아와 삶의 문제를 파고듭니다.
제목에 페소아가 언급된 이유는 아마도 그가 평생 자아발굴을 추구하던 작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페소아는 특이하게도 무려 75개나 되는 각기 다른 ‘이명’(흔히 말하는 필명이죠)으로 글을 썼더랬습니다. 대표적인 세 이명인 알베르투 카에이루, 알바루 드 캄푸스, 히카르두 헤이스는 서명도, 문체도, 관심도, 심지어 철학도 각기 달랐습니다. 한 사람의 몸에는 과연 몇 명의 자아가 공존할 수 있는 걸까요?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에도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가 독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된 책들을 새로 읽거나 다시 읽으면서, 학위과정과 외국생활 중에 까맣게 잊다시피 했던 문학 독서의 즐거움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설은 30년만에 다시 읽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완전히 다른 책으로 느껴지지 뭡니까! 줄거리만 따라가던 어린 시절 독서와는 다른, 다층적인 독서와 분석에 눈을 뜨게 해 준 김운하 작가의 『새벽 2시, 페소아를 만나다』(2016, 필로소픽)을 코센 회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릴레이 다음 주자는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교수이자 ㈜제드건축사사무소 설립자 겸 기술연구소 연구소장이신 이명주 교수님입니다. 제가 베를린에서 첫번째 포스트닥을 지내는동안, 코센 활동을 비롯하여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던 분이신데요, 멋진 인생을 살아가시는 이명주 교수님께서는 어떤 책을 소개해 주실지 기대됩니다.
새로운 릴레이의 첫 주자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 한 권이 내 인생을 결정지었다,는 말이 인상깊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