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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과 자긍심 일라이 클레어(Eli Clare) 저

안녕하세요. 저는 털사 대학교(The University of Tulsa)에서 이번 가을 학기부터 영문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게 될 김유혜입니다. 한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이진미 선생님의 소개로 KOSEN 릴레이북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참가합니다. 저는 평소에 다양한 분야의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전공인 영문학 분야의 소설, 시, 희곡 뿐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의학, 과학에 관한 에세이를 읽으면서 사회의 다양한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세상을 배우고 또 이에 영감을 받아 연구 주제를 정하는 과정이 즐겁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비롯한 르네상스 시대 희곡들이고요, 그중에서도 인종, 성별, 계급에 의한 타자성이 탄생하는 전근대의 역동적인 사회 변화를 읽어내는 작업에 흥미가 있습니다.
 

제가 소개하고 싶은 책은 일라이 클레어(Eli Clare)의 『망명과 자긍심』입니다. 『망명과 자긍심』은 장애인 인권 운동 활동가로 일하는 친구가 소개해 준 책인데요, 소수자 운동과 장애인 인권에 대한 저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 제가 미디어를 통해 보던 장애인들은 주로 비장애인들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동정이 필요한 대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라이 클레어가 말하는 장애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체성과 분리할 수 없는 자긍심을 가질 자신의 일부입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로 인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는 지금 함께 읽어 보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서 추천하고 싶었습니다.

글쓴이인 일라이 클레어는 선천적으로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장애인 당사자입니다. 책은 일라이가 친구와 함께 애덤스산을 등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사대로라면 일라이는 온갖 역경을 넘어 산을 정복하고 인간 불굴의 의지를 표상하는 아이콘처럼 정상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독자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험준해지는 산세와 점점 피곤해지는 육체, 다가오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애덤스산에 오르지 못하고 펑펑 울며 산을 내려옵니다. 일라이는 산을 오르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장애인인 자신이 산을 오르고 싶어 하는 마음, 산에 오르지 못했을 때 자신을 좌절하게 하는 절망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일라이는 비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장애인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대단한 일을 해내는 서사를 ‘슈퍼장애인 서사’ Supercripdom라고 명명합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장애는 이겨내야 하는 무언가로 둔갑하고 비장애인들의 ‘정상성’을 강화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장애인의 삶을 비장애인들의 영감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애덤스산의 정상을 보지 못하고 내려왔을 때 일라이는 아무도 자신에게 “내려오길 잘했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비장애인들이 생각하는 슈퍼장애인 서사에서는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와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장애에 대한 긍지를 갖는 것도 금기시 되어 있습니다. 일라이는 자신 안에 무의식중에 이러한 성공 신화가 영향을 주었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그 산이 나를 놔주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비장애인들이 세워놓은 성공 신화 위에 ‘집’을 짓는 대신, 일라이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을 토대로 스스로를 구축해 나가기로 합니다. 여러 가지 정체성이 겹쳐진 지닌 한 개인이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고 자신이 속할 범주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장애가 있는 몸, 아버지의 성폭력에서 살아남은 몸, 여성이라는 틀에 맞지 않는 소년 같은 몸, 여성을 사랑하는 몸, 노동 계급의 아이로 태어나 산과 자연을 누리며 살아 온 몸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렴하는 대신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불화하고 때로는 서로 포개지며 고유한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일라이는 끝까지 자신이 속할 곳,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젠더는 장애에 다다른다. 장애는 계급을 둘러싼다. 계급은 학대에 맞서려 안간힘을 쓴다. 학대는 섹슈얼리티를 향해 으르렁댄다. 섹슈얼리티는 인종 위에 포개진다……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의 몸 안에 쌓인다. 정체성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몸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미로 전체에 대해 쓴다는 뜻이다.”(263쪽)

외국 생활을 앞두고 한국인이라는 국적이, 동양인이라는 인종 정체성이, 여성이라는 젠더가 혹은 저의 종교나 결혼 여부 등 다 열거 할 수 없는 많은 정체성과 특징들이 언제나 세상의 환대를 받지는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차별에 맞닿았을 때 나를 가장 강하게 하는 힘은 세상과 사회가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는 것, 학대당하고 혐오당한 기억에서 도망쳐 망명하더라도 내 뼈가 다시 붙은 자리가 또 나를 구성하는 기본이 되어 주리라고 믿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습니다.

   다음 릴레이북 주자로는 클레어몬트 대학원(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영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이재준 선생님을 추천합니다. 이재준 선생님은 저보다 앞서 작년부터 미국에서 박사 생활을 시작하셨는데요, 해외 생활 선배로서 그리고 영문과 선배로서 언제나 많은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는 고마운 선배님입니다. 미국 소설 분야에 조예가 깊으시고 석사논문으로 코맥 맥카시의 『더 로드』와 미국 911 테러 트라우마 연구를 하신 선생님의 추천을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맺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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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설악산 등산하면서 몸이 조금 불편하신 분을 만났습니다. 같이 올라가면서 쉼터에서 이야기도 나누고 했는데..속마음으로 잘 올라오실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하산하면서 정상 부근까지 올라오신 그분을 보고 정말 정말 멋지다고 생각 들었습니다 ㅎㅎ 책 리뷰를 읽는데 갑자기 그분이 생각나네요. 좋은 책을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아야 겠어요 :)

손지훈(htlaz) 2022-08-04

전장연의 출근시간 지하철점거시위는 그분들이 출근시간을 놓치게 되는 일반인들의 맘을 백번 알면서도 굳이 행동에
매번 나서야 하는 그분들이 더 안타깝고 도리어 빠르게 법규를 손질 안 하고 못 하는 이익집단들이 더 원망스럽네요.
책 소개 잘 봤습니다.첫 외국생활로 연착 기원하게요.홧팅!

‘슈퍼장애인 서사’ Supercripdom 라는 용어가 있네요. 장애인의 가족은 이 서사를 이루기 위해 같이 협력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 그 가족 구성원 모두 자신의 삶이 아닌 그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이 일생동안 반복되기도 합니다.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는 문장이 참 와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