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과 톨스토이의 단편집 (이달의 주자: 김윤상) 이청준 외 1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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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문학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읽는 모든 책이 어느 정도 자신의 전문분야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게 꼭 책을 읽는 목적은 아닙니다만), 과학/기술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는 일반 교양서적이나 소설을 읽는 것이 자신의 전문분야와는 아무 관련성이 없게 느껴지고, 특별히 자신의 분야에서 어떤 뚜렷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전문분야와 관련되지 않은 일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시간 낭비나 허영이라고 치부될 수도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 특별히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시대의 흐름에 대한 바른 분석이 학문분야와 직종의 차이를 넘어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일이라 여겨지며, 그것이 제가 책을 대하는 자세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제가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책은 이청준과 톨스토이의 단편집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잘 아시고 계시며 다 읽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만, 특별히 그 중에서도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와 「조만득씨」, 그리고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더불어, (보너스로)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와 루시드 폴의 앨범 “레미제라블”을 엮어 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가고자 합니다. 릴레이북이라는 이름에서 조금 벗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되시더라도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제가 처음 '이청준의 단편집'을 접한 것은 대학 새내기 시절이었습니다. 나중에 영화 “밀양”과 “나는 행복합니다”란 작품으로 조금 다르게 해석되어 만들어지고 했던 이 두 소설은, 제게 많은 충격과 고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두 소설작품 모두 결말이 비극적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해결책으로 제시된 과정과 치유의 결과가 도리어 주인공들을 그 이전보다도 못한 더 큰 좌절과 파멸의 나락으로 빠지게 만들었다는 점이, 대학 새내기로서 한참 6월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 저의 연식이 추측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 많은 변화와 갈등 속에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제게 많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은 미국으로 유학을 온 후 몇 년이 되어 나름 미국 생활에 적응해 가던 시기에 접하게 된 책이었는데, 그 단편 중의 일부는 한 동안 아이들이 잠자기 전에 자장가 대신 들려주기도 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아주 쉽고 간단한 이야기로 읽혀지지만 두고두고 그 의미와 해석/적용에 관한 부분을 곱씹게 하는 깊이가 있는 글들이었습니다.
그럼, 이청준의 이 두 단편소설과 톨스토이의 이 두 단편소설, 그리고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와 루시드 폴의 “레미제라블”이 무슨 관련성이 있기에, 왜 이렇게 함께 묶음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하면, 저는 이 소설들과 영화 그리고 음악을 관통하는 그 무엇을 ‘사랑’ 과 ‘행복’ 이란 단어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과 행복이란 단어가 향하는 그 마지막 끝은 ‘사람’ 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벌레이야기」의 주인공이나「조만득씨」의 주인공은 그저 행복한 가정을 꿈꾸었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방영되는 인기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재벌가의 식구들이 누리는 부귀영화와 명성 같은 거창한 것을 바랬던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에서 우리가 늘 하고 있는 가족과의 삶, 그리고 일터에서의 분주함 같은, 반복되어지고 따분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잃어버리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꿈꾸었던 겁니다. 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는 천사는 그런 사람들의 사랑과 행복을 보호하고자 신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나름의 판단대로 행동하다가 벌을 받아 땅에 떨어지게 되면서, 신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의 사랑과 행복을 당신의 섭리를 통해 펼쳐 나가시는지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반면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그런 일상의 사랑과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평생을 좀 더 많은 땅을 얻는 데에 몰두했던 불쌍한 사람의 일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수남 역시 그저 단란한 가정, 그리고 그 가정이 함께 머무를 보금자리를 바라며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만, 녹록지 못한 현실 앞에 그녀의 삶은 계속 꼬여만 갑니다. 그녀의 성실한 노력과 열심이 그녀의 소소한 일상의 삶을 담보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수 루시드 폴은 그의 앨범 “레미제라블”에서 그 제목이 암시하는 그대로 불쌍한 사람들, 하지만 일상의 평범한 행복을 바랬던 사람들을 소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트랙의 한곡한곡이 하나도 버릴 게 없이 소중한 가사와 적절한 멜로디와 익기편성으로 곱게 꾸며지고 있어 제가 아끼는 앨범 중 하나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최근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들을 접하면서, 소득과 삶의 질의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가는데, 이런 불행한 일들에 대해 제대로 책임을 지고 진정한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책을 세우기는 커녕,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미안한 마음조차 가지지 않는 세태를 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선 이청준과 톨스토이가 이들 단편에서 그려주었던 일상의 사랑과 행복조차 쉽게 얻어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리 신과의 관계에서 죄용서함을 받았을지라도 자신의 범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또한 죄용서를 구해야 하는 과정은 전혀 생략될 수가 없는 것이며, 정신병으로 내몰고 있는 우리 삶의 구조적인 현실이 해결되기 전에는 어떤 정신치료도 쓸모 없고 그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이청준씨가 자신의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는 평범한 것일지라도)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주어지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힘써야 하며, 그래서 서울의 꽃등심이 비싸서 사먹지는 못 하더라도 대신 고등어 하나 반찬으로 올려놓고 온 가족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과 소망을 조심스럽게 가져 봅니다.
어쩌다 보니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좋은 환경 속에 자라서 대학을 마치고 이렇게 유학까지 올 수 있었던 저나, 또 특별히 KOSEN 회원들의 경우는, 이미 소소한 일상을 넘어선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자리에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물론, 때때로 자신의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시간을 희생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전문 분야를 통해 우리 공동체와 전인류에 대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 또다른 형태의 행복까지도 추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나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 연구를 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불행한 일들에 어떤 일말의 책임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책임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표현되어지는 또다른 형태가 아닐까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수남은 그저 성실하게 살았을 뿐인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사랑하며 살고 싶었을 뿐인데, 현실은 그녀에겐 그저 넘을 수 없는 묵직한 벽처럼 다가오기만 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의 일상이 영화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더욱 제 마음을 무겁게 누르며, 조금 앞서서 청년의 삶을 살았던 제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살고 있나요?”
우리가 하는 연구와 기술 개발에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없다면, 그저 경제적인 가치나 산업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한다면, 비록 그것이 국가적이거나 민족적이라는 대의적 명분의 허울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우리 사회에서 인간을 도구화하고 상업화하는 자리에 이르고야 말 것이라는 우려와 불안이 앞섭니다.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과 사회, 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재차 확인하고 돌아보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세계에서 맡겨진 일만 묵묵히 수행해 나간다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동참해서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누군가 혹은 어느 집단의 악행을 묵인으로 방조하는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으며, 이에 뒤따르는 역사적인 책임을 결코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누군가는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취직을 위해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에서 수년 동안을 살아야 하며, 아직도 어느 누군가는 우리가 침묵으로 방조하는 구조적인 악에 의해 희생되어지고, 또 그 누군가의 가족들은 그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질병은 치료했는데 환자는 살리지 못하거나 국가는 구했는데 국민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 어리석은 실수를 우리 모두가 범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며,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자로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단국대학교 기생충학 교실의 서민 선생님입니다. 서민 선생님께서 대학원 시절 대학원생들의 일상을 담은 재미난 글이 실린 소식지를 만들다가 교수님으로부터 노조운동을 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서 소식지 만드는 일을 아쉽게도 중단해야 했던 일들이 기억납니다. 여러 신문에 선생님의 시론도 실리고 또 좋은 책들도 많이 쓰셨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책을 좋아하시고 많이 읽으시는 분이라 생각되어 추천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