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은 진리인가? [전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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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너를, 너무 심각하지 않으면서도 내용이 있으며, 추가로 재미까지 있어야 하는 코너라고 혼자 정의해두고 나름대로 충실하려고 애쓰고 있다. 말하자면 고상하고 수준 높은 과학담론에 문화와 재미가 더해진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래서 애당초 이 코너의 간판을 걸 때, ‘르네상스’라는 거창한 단어에, ‘공돌이’라는 다소 코믹하면서도 자기 비하가 섞인 명사를 붙였다. 고백하건대, 나 자신의 일정에 쫓겨 허술하게 원고를 준비한 적도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공을 들이며 여러 번을 고치다가 처음 ‘필’이 꽂혔던 것과는 다르게 두루뭉술한 결론으로 마무리된 적도 있다. 그래도 줄곧 지향한 방향은 (내용이 충실하건 말건) 너무 심각해지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심각하고도 불편한 내용을 다루려고 한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북하거나 비과학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비슷하게 감을 잡았을지 모르겠지만, 신앙과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에서는 ‘과학과 기술’이라는 월간잡지를 발행하는데, 매달 필자에게 배달이 된다. 한국에서 나오는 잉크냄새 나는 정기간행물로는 유일하게 내 손에 들어오는 책이라, 언제나 유심히 읽어본다. 동시대 한국사회의 과학기술자들은 어떤 생각과 가치를 지니고 사는 지를 피상적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8월호에서는 약간 터부시될만한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종교인 중에서도 기독교도들은 물리적 행동까지 불사하는 집단이라, 좀처럼 드러내놓고 비판하기 어려운 지경임에도 기사를 실었으니 상당히 용기 있고도 소신 있는 편집이다.
을 특집으로 한 심층편집은 아니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진화론을 과학적 진실이 아닌, 가설로 적어달라는 창조론자들의 요구가 있었다는 내용이며, 창조론자들이 증거로 제시한 것은 시조새가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종이 아니라고 밝힌 독일학회의 결론이다. 재미있는 현상은 교과서 내용에 관한 기사를 지나 뒤편에, 한 철학교수가 기고한 글에서는 “중국에 (서구를 앞지르는 과학문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혁명이 출현할 수 없었던 것은 (서구적) 중세신학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썼으며, 다윈은 진화론적 발견을 이룬 항해를 마친 이후에는 성직자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찬반양론을 다룬 코너가 아님에도, 진화-창조에 대한 서로 조금씩 다른 주장의 기사들이 실렸다.
정리는 이정도로 하고 이제 필자의 의견을 말해야겠다. 나는 진화론을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창조론은 과학교과서에 과학이론중 하나로 실리지 않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둘 다 증명할 수 없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창조론이 증명 불가한 것은 당연하고, 진화론은 정교한 생체작용이 알려질수록 더 진화시간을 길게 끌고 간다. “어떻게 그렇게 정교하고도 다른 수많은 소화효소가 우리 몸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을 하면, 대답은 항상 “Since long long time…”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시간이 감에 따라 진화론만은 결국 증명되고 말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벌써 단정적으로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감히 그들을 ‘전도’하여 전향시킬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들이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그렇게 믿으려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은 믿음이 아니다. 과학은 실증에 의해 증명된 사실까지만 국한되어야 한다. 현재의 경향이 이러하니 이 추세대로 외분(extrapolating)해보면 자명하다는 이론은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착각이고 환상이다. 수학적 방식에서 내분(Interpolation)은 오차를 동반하지만 뚜렷한 경계조건을 가진다. 즉 왼쪽 값과 오른쪽 값 사이에 있는 값이 내분값이다. 그래서 내분은 참값에 가까운 의미있는 값을 준다. 하지만 외분값은 왼쪽 값, 더 왼쪽 값, 더더 왼쪽 값만 있고 오른쪽 값이 전혀 없다. 오른쪽에 낭떠러지 같은 불연속성이 없을 경우에는 이럴 것이라는 가정이다. 즉 내분은 고대와 현대 사이에서 근대를 찾는 일이라면, 외분은 근대와 현대를 연장하여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래를 찾는 일이다. 만약 외분이 잘 들어맞는다면, 증권해서 돈 잃는 사람들은 바보 중에 바보다. 증권시장에서 그저께와 어제까지의 상종가는 내일 가격에 단지 참고사항일 뿐이다.
그동안 과학만능주의자들의 그 ‘열정’에 많이도 농락당해왔다. 화성에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에서부터, 수백만 광년 너머에 있는 별 이야기까지… 작게는 커피가 해롭다고 했다가, 카페인만 해롭다고 했다가 이제는 카페인을 뺀 커피는 더 안 좋다는 기사까지 나왔다. 이과에서 제일 공부 잘했던 의사선생님들에 의해 하루하루 뒤죽박죽 다르게 나오는 ‘과학건강뉴스’에 우리 식생활을 어디에 맞출지 몰라 아주 피곤한 지경이다. 다만 그들이 어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과학을 알리겠다는 열정과 내일의 진리를 위해 오늘의 시행착오를 겪는 것으로 좋게 이해해줄 뿐이다.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도구이며, 그 자체가 신앙이 아니다. 더 쉽게 말하면 과학은 알려진 진실에 국한되어야만 한다. 충분한 증거가 없는 사실에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중세교회가 한 실수를 현대 과학에서 다시 되풀이하는 일이다. 다만, 과학의 발전은 필히 그 과정에서 실수를 동반하므로, 확실치 않으면 발설하지 말라는 논지는 지나치다. 그러므로 가설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용기가 필요하며, 밝혀짐에 따라 가설을 진실로 바꾸어가면 된다.
으로 과학을 무시하는 사고는 우스꽝스럽지만, 과학을 종교로 만드는 것은 아주 위험한 오만이 될 수밖에 없다. 개미는 개미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위에서 전체 개미떼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는 인간이 개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초월자가 아닌 우리가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우리와 주위를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한 일인지 모른다. 마치 자연수만으로 자연수끼리의 연산을 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필히 정수에서 유리수까지 확장된 수가 생기는 것처럼…
여러가지 어려운 말들이 많았지만 의미있는 내용이며 신선합니다. 과학자들 중에는 신앙인이 더 많다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런거겠죠? 과학적으로 다 밝힐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을때 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인간의 힘으로 밝혀내려는 사람이 있겠죠. 결론은 꼭 과학적이지 않은데 말이죠. 과학은 신앙과는 좀 다른 선상에 있는것 같습니다. :)
언제나 명쾌한 담론.... 유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