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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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는 항상 고구마와 같이 붙어다니는 녀석인데, 고구마보다는 사랑을 좀 덜 받는 것 같습니다. 찌기 전에 물로 씼기만 해도 표면이 아름답고, 찌고나면 빛깔도 맛도 좋은 밤고구마는 거의 ‘군밤’의 지위를 누립니다. 반면 요즘 찐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는 소금을 짭짤하게 뿌려서 찐 주먹만한 감자를 맛있게 먹곤 했습니다. 감자는 남미가 원산지이며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으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외모지상주의 세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고구마보다는, 못생긴 감자가 훨씬 더 경작하기 쉬운 식물이라고 합니다. 더운데나 추운 곳, 건조지역이나 습한 지역을 가리지 않고 자란다니까요. 요즘 우리가 맥도날드에서 먹는 감자튀김을 영어로는 French Fries 라고 하죠? 실제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벨기에 지역 소산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곳을 자주 여행해보았는데, 감자튀김이 우리 식단의 밥에 해당한다고 보면 좋을 정도입니다. 감자의 ‘감’자가 ‘감언이설’의 ‘감’자와 동일하게 달달하다는 뜻이네요. 고구마는 프랑스어로 Patate 라고 해서 영어의 감자에 해당하는 Potato와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마를 감자라고 하는 지역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어에서는 감자를 훨씬 높혀 부릅니다. Pomme de Terre라고 하는데, 뜻은 ‘땅에서 나는 사과’라는 뜻입니다. 사과는 이브와 윌리엄텔 그리고 뉴턴과 맥켄토시를 거치며 인류역사의 신화를 형성했는데, 감자에게 사과와 동등한 작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낭만 없는 공학적 분석으로 들어가보면, 감자는 열용량이 아주 큰 모양입니다. 그래서 된장찌게에 들어있는 감자를 숫가락에 올리고는 성의 없이 겨우 한두번만 불어서 입에 넣었다 낭패를 본 적 있으시죠? 그래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내뱉자니 같이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큰 결례이고, 삼키자니 목구멍이 타들어갈 것 같아 입안에서만 굴리며 어쩔 줄 몰라하게 만드는 뜨거운 감자 말입니다. 정치용어로 자주 쓰이는 이 말도 재미있군요.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입안에 감자도 식어서 먹을만 하니 일단은 관망하며 지긋이 참으라고 조언하면 되려나요?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니까요. 요즘 미투운동 때문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이런 것이겠죠?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으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세요. 달도 차면 기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남들은 봄을 기다리는 이 때에, 길고도 추운 겨울을 준비하셔야 하니 감자 찌는 법이라도 배워두세요.
각설하고, 1884년에 그렸다는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을 암스텔담의 고흐미술관에서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어두운 호롱불 밑에 모인 5명이 감자를 먹고 차를 마시는 장면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농부일 것이고, 해질 때까지 일을 하다가 저녁늦게 같이 모여앉은 모양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인상파 화가들은 정말 민주주의를 견인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인상파 이전의 작가들은 성경이나 고전 속의 위인들 아니면 왕과 귀족들을 그렸습니다. 그래야 돈도 권력도 생기니까요. 하지만 인상파 시대에 와서는 전부 보통사람들을 화폭에 담습니다. 그들은 삼국지에 나오는 호걸들의 도원결의처럼 의기충일하여 같이 모여앉습니다. 그리고 입선되면 출세가 보장되는 살롱전 (1981년에 폐지된 우리나라의 ‘국전’같은 화가들의 등용무대) 에 출품하지 않고 다같이 모여 첫번째 미술전을 기획한 것이 1874년 봄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인류역사상 문화의 물줄기를 바꾼 가장 큰 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예술의 관심과 촛점이 시민들의 일상으로 넘어간,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니까요. 그들이 그린 많은 그림들, 마네의 ‘풀밭 위에서의 점심’이나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언제 결혼 하니?’ 그리고 세잔느가 그린 ‘카드놀이하는 사람들’까지 모두가 서민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입니다. 이 그림들이 2억5천만 달러 또는 3억 달러에 팔려 미술 경매의 기록을 갈아치운 그림들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들 모두를 대표하는 그림이 ‘감자먹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집니다. 고흐가 그린 또 다른 그림 The Starry Night는 훨씬 낭만적이고도 환상적인데, ‘감자 먹는 사람들’ 속에는 그 어떤 낭만이나 판타지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치열한 일상 자체가 가장 가치있고 오히려 더 멋진 낭만이라는 메세지를 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비교적 초기작이긴 하지만, 고흐 자신도 이 그림이 자신의 그림 중 가장 훌륭한 그림이라고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흔해빠진 감자도 못먹어서 많은 사람들이 아사한 슬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는 영국식민지였습니다. 영국의 착취가 심해서 고급식량인 밀은 거의 본토로 실려갔고 감자가 주식이었는데 감자마름병이 돌아서 인구 반의 반이 죽고, 또 반의 반은 북미로 이민을 떠난 역사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기근 이후에 아일랜드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고흐의 그림은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전역을 휩쓴 감자돌림병이 한 세대 지난 후 태어났습니다. 자신들 부모 세대가 겪은 불가항력적인 전염병 후에, 비록 힘들어도 자기 손으로 일하여 먹고 살수 있다면 인생은 행복한 것이란 결론을 아마 그림 속 주인공들은 알았을 것 같습니다. 비트 코인 시대에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교훈입니다만, 윗세대는 부동산 ‘투자’로 쉽게 돈벌어놓고 우리에게는 비트코인이 ‘투기’라고? 하며 되묻는 젊은이들에게는 뭐라고 답해야 하나요? 부동산 불패신화는 이미 흘러갔고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 말해도 되나요? 정말 뜨거운 감자 같은, 그러나 기성세대가 꼭 책임지고 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말입니다.
미국에선 고구마보다는 감자를 더 많이 먹는거 같아요
메쉬드 포테이토, 후라이드 포테이토 등... 찐 감자는 아니지만서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