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에 관한 소고
- 1088
- 1
- 0
나는 글씨가 엉망이다. 어릴 때 발표력이 좋다는 선생님의 평을 자주 들어봤지만, ‘공책 검사’를 당하는 날에는 손바닥에 불이 나는 반전을 간혹 겪었다. 반면, 고3 시절에 갑자기 친해져서 서로의 공부를 망치게 한 절친은 글씨가 너무 뛰어나 볼펜으로 썼는데도 붓글씨 같았다. 잘난 그는 ‘글씨는 마음의 창’이라고 나를 놀리곤 했고, 나는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 수 없다고 응수했었다. 다른 대학에 진학한 후에 서로 자주 서신교환을 했는데, 내용을 읽기도 전에 펼쳐진 편지종이의 글씨에서 감탄사가 먼저 튀어나왔다. 그렇게 멋지게 글씨를 쓰는데도 필기속도는 나보다 훨씬 빨랐으니 이해불가! 또 다른 넘사벽은 고1때 한문선생님이셨다. 칠판 가득 한자를 써두고 설명을 시작하지만,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수업을 들은 적은 없다. 판서된 한자를 베끼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시절에 귀동냥은 조금 한 덕에, ‘와신상담’이니 ‘결초보은’이니 하는 사자성어는 몇 개 익혔다.
연필을 자판으로 바꾸어준 컴퓨터는 글씨체 안좋은 사람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글씨를 쓰는 것이나 타이프를 치는 것이나 모두 손동작이라, 손재주 없는 나는 여전히 독수리 타법이라는 무공 밖에 익히지 못했다. 영어-프랑스어-한글을 섞어서 쓰는 환경에 살다 보니 세가지 자판을 모조리 외우는 것은 불가하여 고개를 도저히 들 수 없다. 그래서 화면에 ‘dlnefnlsefnlef ‘처럼 암호같은 글이 타이프되는 줄 모르다가, 돌쟁이 아이처럼 떨어진 목을 가까스레 세우는 순간 신음소리를 내밷는다. AI 어쩌고 떠들지만, 언어 자동전환이 내가 필요할 때 먹히는 경우는 드물다. 컴퓨터의 가장 큰 약점은 눈치가 없다는 것이다. Made in Korea 인 카톡 역시 굵은 엄지로 누른 단어들이 확인 전에 엉뚱하게 전송되니 가끔 민망하다. 인간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다. 분명히 기억나는 일임에도 본인이 적어둔 것과 기억을 비교하면 차이가 난다. 아예 완전히 다를 때도 있다. 그래서 바로 조금 전에 한 말도 아니라고 우기는 쪽과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고 핏대를 올리는 쪽이 속기록을 가져오라고 싸우는 국회 토론 영상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발언 당사자는 wish로 바꾸어서 기억했겠지만, 속기록은 truth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래서 기록하는 민족만 제대로 된 역사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기록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몇 번 야심차게 기록을 시작했지만, 항상 용두사미로 끝난다. 이런 연유로 우리 집에는 몇 장만 사용한 노트들이 너무 많다. 몇 년전 다이어리도 연식은 오래지만 내부는 너무 깨끗해서 들쳐보는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이제 문장기록은 포기하고 키워드만 휴대전화기에 적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생각이 떠올라도 내용 대신 단어만 적어두니, 애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글이 진행되어 새로운 창작의 기쁨을 누릴 때도 있지만, 대개는 짜증을 동반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나는 필기 잘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약간의 컴플렉스가 있다. 너무 비꼬는 투가 될 것같아 조심스럽지만, 지금은 감옥에 계실 한분을 나는 가장 중요한 촛불 공로자라고 생각한다. 그분의 꼼꼼한 기록이 정황증거들을 확증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정말 모두가 본받아야 할 공직자이셨다. 그분은 ‘기록하는 민족만이 역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셨으니까. 그러고보니 전정권의 각료회의 영상장면을 잠깐 본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시간에 쫓기던 받아쓰기 시험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참 겸손하신 분들이었다. 평생 수재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셨을 고위관료들이 여전히 배울 것이 많아서 꼼꼼하게 받아 적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북한 지도자의 ‘현장지도’ 장면 사진을 보게 되었다. 아니! 세상에… 거기는 책상도 없는 야외에서 선 채로 받아적는 모범생 엘리트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래서 우리는 한형제인 것인가? 우리는 확실히 교양미 넘치는 기록의 민족인 것이다.
비아냥은 이정도로 멈추고, 결론을 지어야겠다. 회의는 의견을 교환하기 위한 자리다. 그래서 원탁을 사용하여 최고 책임자의 위치가 표시나지 않게 배치하면 더 좋은 토론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원탁의 기사들’이라는 이야기에 나오는 원탁이 그런 의미다. 길다란 테이블에 서열순으로 앉아 받아 적는 회의는 토론이 아니라 지시다. 회의를 토론이 아니라 지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대책은 한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속하게 대응해야 할 자연재해는 인간들의 서열을 모르기 때문이다. 토론으로 모아진 집단지성의 힘에, 지시라는 강제력이 동반될 때에만 대책이 먹힌다. 무작정 받아적는 회의는 모나미 볼펜 매출은 올려줄 지 모르지만, 모두의 창의력을 덮어버리는 독이다. 성경에는 기도할 때는 골방에서 하라는 말씀이 있다. 남들이 보는 거리에서 드리는 기도는 위선이라고도 했다. 기록도 마찬가지다. 다난했던 일과를 끝내고 자기만의 공간에서 하는 기록은 자기 성찰의 거울이요, 세월이 지나면 소중한 사료가 되겠지만, ‘주군’이 보는 앞에서 하는 필기는 아부나 예의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제쯤 노트는 덮어두고, 서로가 지위를 떠나 자유롭게 토론하는 회의를 볼 수 있을까? 지위는 토론에서는 필요 없고 실행할때만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면 정말 최악이다. 이를테면 토론의 결론은 지위로 결정되고, 정작 실행할 때는 지휘계통이 무시되는 경우 말이다. 그런 단체나 국가는 효율만 나쁜 정도에 그치지 않고 존폐마저 위태롭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토론 없이 지위로 밀어부친 결정사항을 실행할라치면, 지휘계통이 자주 무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 실행자들은 “당신의 결정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생각에 팔장끼고 있는 것이다. 심한 경우 “저런 계획이 잘되면 내가 열손가락에 장을 지지지!”라는 억하심정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서로가 충분히 논의하지 않은 결정이기에, 명분도 논리도 모자란 탓일게다. 민주주의는 집단지성으로 결정하고, 조직적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결정은 유연하게, 그러나 집행은 추상같이 해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동시에 세워진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죽을 때까지, 아니 대를 이어가며 연구해야 할 우리 모두의 과제다. 그나저나, 벌써 연말이니 올해에도 다이어리를 사서 또 써봐야 하는지 약간 고민이 된다. 세계 각곳의 코세니아님들 모두 몸과 마음이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 바라며…